[시가 말을 걸다] 석연경 ‘내게 황금보탑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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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석연경 ‘내게 황금보탑이 있다면’
  • 동명 스님
  • 승인 2022.02.15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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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탑의 나라 미얀마
탑의 나라 미얀마

내게 황금보탑이 있다면

비 내리는 겨울밤 사라져
버린 지난여름을 생각하며…
곧 떠나야 할 겨울의 품안에 웅크리고 있네
겨울비가 젖은 몸을 다시 적시고
식은 여름이 부은 발목을 휘감네
때가 되면 마땅히 떠나야 하리
벽에 걸어두었던 빛바랜 그림과
바싹 말라 꽃잎 몇 장 떨군 마른 꽃다발도
겨울밤 비 너머로 걷어내야 하리
한여름 울창한 숲을 향해 타오르던
연꽃 정원이 있었지
뾰족한 연분홍 꽃봉오리 환하게 열며
열망했던 가을 숲으로의 산책
이제 텅 빈 벽을 바라보며
불꽃의 얼룩과 꽃길의 그림자를 더듬네
이명이 울리는 것
울음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
겨울비가 내리는 건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것
겨울비에 젖으며 깊어가는 밤
멀리 보탑 하나가 물 위에 어른거린다면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봄날의 파동이리
황금빛 탑신 물 위에 드리우면
잔물결로 놓이는 황금물결 다리
나 또한 황금보탑으로 서서
당신을 향해 몸을 뻗으리니
내게 황금보탑이 있다면
황금보탑으로 당신을 비추리
우리 함께 빛나는 날
만발하는 황금보탑
세계는 황금보탑으로 일렁이리

(석연경 시집, ‘푸른 벽을 세우다’, 시와세계 2021)

탑의 나라 미얀마
탑의 나라 미얀마

[감상]
올해는 봄이 일찍 올 것 같은 예감입니다. 입춘 추위가 제법 거셌지만, 입춘이 지나니 몸을 만지고 지나가는 바람의 온도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아마 이 무렵 시인은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겨울비가 내리는 밤, 시인은 오히려 지난여름을 생각합니다. 아예 시인의 감각 속에서 겨울밤은 ‘식은 여름’이기까지 합니다.

“때가 되면 마땅히 떠나야 하리”

우리나라의 계절만큼 이 약속을 잘 지키는 이가 또 있을까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아무리 붙잡아도 때가 되면 떠납니다. 시인이 오래 걸어두었던 빛바랜 그림과 마른 꽃다발을 시간이 되면 걷어내듯이 ‘그렇게 지나간’ 계절을 떠올립니다. 한여름 울창한 숲을 향해 타오르던 연꽃 정원이 있었고요. 가을 숲으로의 산책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텅 빈 벽을 장식했던 불꽃의 얼룩과 꽃길의 그림자를 더듬다 보면 울리는 이명(耳鳴), 그리고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

“이명이 울리는 것
울음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
겨울비가 내리는 건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것”

겨울은 아무래도 화자에게 아픈 계절인가 봅니다. 겨울비에 젖으며 깊어가는 밤에는 그렇게 이명이 울리기도 하고 눈물이 나오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렇게 슬프기도 한 세월이지만, 그 슬픔 혹은 눈물 위에서 보탑 하나가 어른거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시인은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봄날의 파동”이라고 해석합니다.

언젠가부터 시인들이 ‘당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그 당신의 정체를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허수경 시인의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혼자 가는 먼 집’)을 떠올려볼 뿐입니다. 시인마다, 어쩌면 시마다 ‘당신’의 정체가 다르리라 생각하며, 만해(한용운) 스님의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의 ‘님’과 동의어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면서 그냥 지나갑니다.

다가오는 봄은 생각해보면 황금보탑이거나 황금보탑 이상이지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인간이 만들었거나, 혹은 신이 만들었다 해도 어떤 황금보탑이 온 산천을 꽃밭으로 만드는 봄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봄이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아름다움을 황금보탑이라 생각해봅니다. 그 황금보탑 이상의 황금보탑, 곧 봄을 황금보탑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그만큼 깨끗한 마음,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불성(佛性)이고요. 아름다운 봄을 아름다운 봄의 마음으로 맞이하는 그것이 곧 황금보탑의 나라, 다른 말로 불국토(佛國土), 아니 그냥 꽃물결이 출렁이는 봄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황금보탑의 나라가 머지않았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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