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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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성취
  • 관리자
  • 승인 2007.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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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내 신앙의 바탕은 절(禮拜)에서 비롯되었다.

1968년 여름이니까 꼭 30년 전 일이다. 당시 해병대 대위로 제대한 나는 대학원(석사과정)에 적을 두고는 있었지만 아직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한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다행히 동양 철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유교와 불교를 같이 연구하고 싶은 욕망에서 불교공부는 물론 불교계 인사들과도 많은 인연을 갖게 되어 그해 여름방학에 대불련 회원들과 몇몇 교수, 그리고 불교를 이해하는 시인들까지 함께하여 해인사에 연수를 간 일이 있었다.

해인사에서 일주일간 연수를 할 때 나는 어느 분의 강의보다도 성철 큰스님의 법문을 감명 깊게 들었다. 그러나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연수가 끝날 무렵 그분께서 삼천배를 하고 회향하도록 하라는 분부를 듣고 나서였다.

우리 일행은 말이 삼천배지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중에 시인 P씨는 “불교가 과연 절을 통해야만 이해되는 것인가, 이렇게 강압적으로 절을 시키는 도그마가 어디 있는가?”라고 거칠게 말하고 나서 드디어 그는 혼자 하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우리들은 삼천배를 시작했다. 절을 하면서도 나는 한때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한순간 절을 포기하고 하산한 그 시인의 개성 있는 행동이 부럽기도 하고 그렇게 용기(?)있게 포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결국 이겼다. 이렇게 삼천배를 끝내고 나니까 나 스스로를 이긴 그 희열 앞에 후회했던 그 어리석음이 다가서기도 했다.

지금의 신도들은 삼천배를 많이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러한 예배의식에 논란이 꽤 있을 때였다. 그 중의 하나가 법정(法頂) 스님의 유명한 ‘굴신운동’이라는 글이었다. 불전에서 몇 자리의 절을 했다고 해서 무슨 기록의 소지자처럼 으시대는 아상(我相)도 문제며, 그 절 하는 동작 또한 가관이니 그게 굴신운동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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