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족] 아버지 숫도다나왕
상태바
[붓다의 가족] 아버지 숫도다나왕
  • 유근자
  • 승인 2024.04.26 17: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전미술에 나타난 정반왕

석가모니불의 아버지 숫도다나는 정반왕(淨飯王)·백정왕(白淨王)·진정왕(眞淨王) 등으로 번역됐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반왕이 가장 널리 사용됐다. 석가모니불의 가계는 중국 양나라(502~557) 때 승우(僧祐) 스님이 지은 『석가보(釋迦譜)』에 자세히 전한다. 석가모니불의 할아버지는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정반왕, 둘째 아들은 백반왕, 셋째 아들은 곡반왕, 넷째 아들은 감로반왕이었다.

석가모니불은 도솔천에 계실 때 태어날 곳을 찾다가 성품과 행실이 어진 정반왕을 아버지로, 온화하고 어진 성품의 마야를 어머니로 정하고 흰 코끼리의 모습으로 내려와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갔다. 정반왕이 석가모니불의 일대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어머니 마야의 꿈을 해석하는 장면에서부터다.

석가모니불이 주인공인 불전미술(佛傳美術, 석가모니의 생애를 표현한 그림·조각 등)에서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가 나란히 표현된 것은 태몽을 해석하는 장면이 유일하다. 이 장면과 연관된 유적이 네팔의 틸라우라코트(Tilaurakot)에 남아 있는 무덤이다. 틸라우라코트는 석가모니불의 탄생지 룸비니 사원에서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네팔 쪽에서 주장하는 석가모니불의 고향인 카필라바스투(까삘라왓투)이고, 인도에서는 우타르프라데시주(州)에 있는 피프라와를 카필라바스투라고 주장한다. 두 지역의 거리는 16km인데 틸라우라코트에는 카필라 성의 성곽 유구가 잘 남아 있고, 피프라와에는 석가모니불의 사리와 사리를 봉안했던 탑 유적이 잘 남아 있다. 

틸라우라코트 북쪽 성벽이 잘 남아 있는 곳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 두 개의 탑이 있다. 큰 탑(직경 약 16m)은 아버지 정반왕, 작은 탑(직경 약 8m)은 어머니 마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도판 1]. 두 탑은 성 밖에 위치해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 전에 동남서북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한 ‘사문유관(四門遊觀)’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는 설도 있다.

[도판 1] 네팔 틸라우라코트에 있는 정반왕과 마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2023년 2월 촬영), 사진 이상원 

 

싯다르타의 태몽과 해몽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표현한 인도 불전미술에서 정반왕은 싯다르타 태자의 태몽 해석, 관상, 첫 명상 장면에 등장해 아버지의 역할이 강조됐다. 이와 달리 중국 불전미술 속 정반왕은 임종을 앞두고 아들인 석가모니불에게 위로를 받는 장면이 남아 있다. 인도인들은 정반왕을 아버지로서 주로 등장시켰다면, 중국인들은 나이 든 부모 정반왕을 봉양하는 아들 석가모니불의 역할을 강조한 면이 있다.

마야 왕비는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꾼 뒤 남편 정반왕에게 꿈을 풀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반왕은 관상을 잘 보는 바라문에게 해몽을 청했다. 태몽을 전해 들은 바라문은 “태 안에 든 아들은 석가족을 빛나게 할 것이다. 태 안에 내려올 때 여러 천신이 에워싸고 왔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징조다. 그러나 출가하지 않는다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간다라 불전미술 가운데 <해몽> 장면은 <태몽>과 함께 구성됐다[도판 2]. 화면 오른쪽에는 왼쪽 옆구리를 침상에 대고 등을 보이고 누워있는 마야 왕비가 중앙에 있고, 좌우에는 그녀를 보호하는 무기를 든 두 명의 여인이 서 있다. 밤을 상징하는 등불이 마야 왕비의 얼굴 앞에 놓여 있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흰 코끼리는 신성함을 상징하는 원 안에 표현됐다. 

[도판 2] <태몽>(오른쪽)과 <해몽>(왼쪽), 간다라(2~3세기), 출처 중국 고궁박물원

향좌측에는 정반왕, 꽃을 든 마야, 수염을 기른 바라문이 앉아 있다. 바라문은 긴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수행자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에 앉은 정반왕은 머리에 터번을 쓰고 귀걸이와 목걸이를 했으며, 상체를 노출한 채 왼쪽 어깨에 옷자락을 걸치고 있다. 간다라 불전미술에 표현된 신분이 높은 인물들의 전형적인 차림새다. 정반왕은 바라문에게 꿈 해석을 듣고 있으며, 마야 부인 역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간다라 불전미술 속 정반왕의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된 것으로는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된 <해몽>을 들 수 있다[도판 3]. 정반왕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등받이와 발 받침대가 있는 의자에 두 다리를 교차한 채 앉아 있다. 머리 위에 있는 햇빛 가리개 일산(日傘)과 좌우 두 시녀가 든 불자(拂子)는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좌우 손에 물병을 든 두 인물은 꿈을 해석하는 바라문 수행자다.

[도판 3] <해몽>, 간다라(2~3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출처 중국 고궁박물원

남인도 나가르주나콘다 절터에서 수습된 탑을 장식한 석판 가운데 석가모니불의 탄생 전후에 일어난 네 가지 사건이 새겨진 작품이 있다[도판 4]. 석가모니불의 탄생 전후 이야기는 아래부터 ‘태몽의 해석’(하단) → ‘탄생’(중단) → ‘관상과 사당 참배’(상단) 등으로 전개된다. ‘태몽의 해석’, ‘탄생’, ‘관상’, ‘사당 참배’ 네 가지 에피소드 중 정반왕은 태몽의 해석 장면과 싯다르타 태자의 관상을 보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도판 4] 싯다르타 태자의 탄생 전후 이야기, 남인도(3세기 말), 나가르주나콘다 출토, 
인도 뉴델리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이상원

남인도 나가르주나콘다 불탑을 장식했던 ‘도판 4’의 아래쪽에 표현된 해몽(태몽의 해석) 장면[도판 5]은 간다라 불전미술과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단순한 등장인물로 구성된 간다라 해몽 장면과 달리 남인도 해몽 장면은 정반왕, 마야 왕비, 바라문뿐만 아니라 제석천과 사천왕을 비롯한 천신 등 등장인물이 많다. 많은 등장인물과 함께 인물의 표현 방식 역시 간다라의 표현법과는 다르다.

[도판 5] <태몽의 해석>, [도판 4]의 하단 부분

간다라 해몽 장면의 정반왕과 마야 왕비 그리고 바라문 수행자는 두꺼운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남인도 해몽 장면의 인물상은 대부분 신체를 노출시켜 인체의 양감을 강조했다. 남인도 해몽 장면 속 정반왕은 보석으로 장식된 터번을 쓰고, 다양한 장신구로 몸을 장식했으며, 상의는 벗은 채 하체에만 짧은 치마를 입었다. 인도 미술 속 왕의 모습은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왼손을 허리에 대고,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리거나 가부좌를 하고 앉은 자세가 보편적이다. 

석가보살이 도솔천에서 어머니 마야의 태 속으로 내려올 때 함께 온 사천왕은 정반왕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반왕과 다른 점은 오른손을 들어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을 세우고 두 다리를 아래로 나란히 내린 것이다. 사천왕 가운데 세 명은 정면을 바라보고 한 명은 향우측 아래에 앉아 등을 보인 채 얼굴을 돌려 정반왕을 바라보고 있다. 등을 보인 사천왕의 맞은편에는 정반왕보다 한단 아래에 앉아 있는 마야 왕비가 있다. 정반왕이 앉은 자세는 인도 미술 속 왕의 모습에 자주 표현된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린 유희좌(遊戲坐)라면, 사천왕은 두 다리를 내리고 앉은 의좌(倚坐)를 취하고 있다.

제석천으로 보이는 인물은 정반왕과 사천왕 사이에 높은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물병을 들고 있다. 태몽을 해석하는 바라문은 제석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 기록하고 있는 인물로 추정된다. 남인도 해몽 장면 속 바라문은 정반왕·사천왕·제석천에 비해 존재감이 약한 반면, 간다라 해몽 장면 속 바라문은 정반왕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싯다르타의 탄생과 관상

인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선인(仙人)으로 하여금 아이의 타고난 외모를 살펴 앞으로 전개될 아이의 운명을 살피는 관상법이 있었다. 정반왕은 싯다르타 태자를 당시 유명한 아시타(Asita) 선인에게 보여, 태자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물었다. 

아시타 선인은 싯다르타 태자의 얼굴을 살피다가 눈물을 흘렸다. 깜짝 놀란 정반왕이 그 이유를 묻자 아시타 선인은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부처의 탄생을 보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라고 말했다.

간다라 불전미술 <해몽>과 <관상>은 정반왕, 마야 왕비 또는 마하파자파티(마하빠자빠띠), 바라문 수행자가 등장해 비슷한 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몽>은 <태몽>과 함께 표현된 예가 많고, <관상>은 <탄생>과 연이어 표현된다[도판 6]. 또 다른 점은 싯다르타의 유무이다. 

[도판 6] <탄생>과 <관상>, 간다라(2~3세기), 출처 중국 고궁박물원 

간다라의 태자 관상을 보는 아시타 선인과 함께 표현된 정반왕의 모습은 해몽 장면 속 정반왕과 같다[도판 7]. 정반왕 왼쪽에 앉은 여인은 마야 왕비가 아니라 이모 마하파자파티이다. 마야 왕비는 싯다르타 태자가 탄생한 지 7일 만에 돌아가셨고, 아시타 선인이 싯다르타 태자의 관상을 본 시점은 그 이후이기 때문이다. 

[도판 7] <관상>, 간다라(2~3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소장, 사진 유근자

정반왕은 <해몽> 장면에서처럼 몸을 돌려 아시타 선인을 바라보고 있다. 아시타 선인은 긴 머리칼을 올려 묶었고 수염이 길며 상체는 벗은 모습이다. 아시타 선인은 싯다르타 태자를 안고 오른손을 뺨에 대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이것은 120세인 아시타 선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부처님의 탄생을 보지 못할 것을 상심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남인도 나가르주나콘다 사원에서 발견된 <관상> 장면은 <사당에 참배하는 싯다르타>와 함께 표현됐다[도판 8]. 정반왕은 ‘도판 5’의 <태몽의 해석> 장면과 차림새는 같지만 몸을 틀어 싯다르타 태자를 안고 있는 아시타 선인을 바라보고 있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간다라 <해몽> 장면 속 인물들은 같은 크기인 것에 비해, 남인도 <태몽의 해석(해몽)> 장면에는 정반왕과 아시타 선인이 크게 표현됐다. 아시타 선인은 수행자를 상징하는 머리카락을 올려서 높고 큰 상투를 틀었고, 입가에는 세로 주름선을 넣어 나이가 많음을 표현했다.

[도판 8] <관상>(오른쪽)과 <사당 참배>(왼쪽), [도판 4]의 상단 부분 

간다라인들은 싯다르타 태자를 사색에 잠긴 아시타 선인이 오른손을 뺨에 댄 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와 달리 남인도인들은 아시타 선인이 발자국(불족적 佛足跡)으로만 표현된 싯다르타 태자를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으로 대신했다. 아시타 선인 아래에 히말라야에서 함께온 조카 날라카가 표현된 점은 간다라 <해몽> 장면과 다르다. 태자를 안고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아시타 선인과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한 정반왕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아들에게 참배하는 정반왕

인도 불전미술 속 정반왕은 주로 탄생을 전후한 해몽과 관상 장면에 주로 등장한다. 이때 정반왕은 바라문에게서 장차 아들이 전륜성왕이나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 모습이어서 주로 의자에 앉은 왕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달리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의 싯다르타와 정반왕의 관계를 보여주는 <첫 선정에 든 싯다르타> 장면 속 정반왕은 아들에게 절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잠부나무(염부수閻浮樹) 아래에 앉은 싯다르타는 밭갈이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땅속에서 벌레가 나오자 까마귀가 벌레를 쪼아 먹고 독수리가 까마귀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광경을 보고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됐다. 정반왕은 잠부나무 아래서 삼매에 든 태자를 덮고 있는 나무 그늘만은 옮겨 가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이 모습을 본 정반왕은 기쁜 마음이 치솟고 공경심이 생겨서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 태자에게 예를 표했다. 

간다라의 첫 선정에 든 아들에게 절하는 정반왕은 무릎을 꿇고 싯다르타 태자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이다.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한 채 아들에게 예를 표현한 정반왕은 시크리 사원지에서 출토된 탑 부조상을 통해 알 수 있다[도판 9]. 표면은 손상됐지만 윤곽은 남아 있어 전체 모습은 파악할 수 있다. 

[도판 9] 첫 선정에 든 싯다르타와 예를 표한 정반왕, 간다라(2~3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소장, 사진 송봉주

첫 선정에 든 싯다르타에게 절을 하는 정반왕이 싯다르타에 비해 작게 표현된 예로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을 들 수 있다[도판 10]. 정반왕은 싯다르타가 앉은 대좌 향좌측에 표현됐다. 그는 합장하고 왼 무릎을 땅에 대고 고개를 들어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정반왕은 <해몽>과 <관상> 장면에서 주로 터번을 쓴 모습인데 여기서는 상투를 틀었다. 또한 정반왕이 상체를 노출한 것은 싯다르타 태자에게 그늘을 만들어준 잠부나무의 상서로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판 10] <첫 선정에 든 싯다르타>를 표현한 불전미술 속 정반왕(대좌 왼쪽), 간다라(2~3세기),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소장, 출처 『알렉산더 대왕이 만난 붓다』

 

죽음을 앞둔 정반왕

인도와 중국 불전미술의 특징은 석가모니불의 아버지 정반왕에 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다라 불전미술에서는 아버지 정반왕이 아들 싯다르타에게 절하는 에피소드가 소재로 선택됐다면, 중국 불전미술에서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 정반왕을 위로하는 아들 석가모니불이 소재로 표현됐다. 아버지 정반왕은 임종을 맞아 침상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데 얼굴에는 세상의 흔적이 담긴 주름이 새겨져 있다. 아들 석가모니불은 한 손으로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아버지의 머리에 얹고 고개를 숙여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다[도판 11]. 

[도판 11] 임종을 앞둔 아버지 정반왕과 아들 석가모니불, 남송(1174~1252), 사진 유근자

간다라 불전미술을 꽃피운 쿠샨인들이 아들에게 절하던 정반왕을 주목한 것과 달리, 중국인들은 임종을 앞둔 정반왕이 아들 석가모니불에게 위로받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은 효(孝)를 행하는 아들로서의 임무를 강조한 중국인들에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던 소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배경은 『부모은중경』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죽음을 앞둔 정반왕이 표현된 사천성 대족(大足) 보정산(寶頂山) 석각(石刻)은 남송(1174~1252) 때 70여 년에 걸쳐 조성됐다. 중국인들은 효를 강조한 다양한 석가모니불의 전생과 불전(佛傳)을 바위 면에 새겼는데, 임종을 앞둔 정반왕과 돌아가신 아버지 정반왕의 관을 메고 가는 석가모니불을 표현한 장면[도판 12]이 그 가운데 하나다.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석가모니불의 모습은 중국화된 불교의 단면을 나타낸 것으로, 효를 강조한 유교사회에서 불교가 뿌리내리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도판 12] 아버지 정반왕의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석가모니불, 남송, 사진 유근자

 

한국 팔상도 속 정반왕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반왕은 어떻게 인식됐을까? 필자는 그 단서를 조선 전기에 제작된 석가모니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 속에서 찾았다. 현재 용인 호암미술관의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기획전에 출품된 팔상도 장면 속 정반왕의 모습을 보자.

정반왕은 부인 마야 왕비가 꾼 흰 코끼리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태몽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다[도판 13]. 건물 안의 정반왕은 면류관을 쓰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채 부인 앞에 앉아 꿈 이야기를 하는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 정반왕 뒤에는 조선시대 산수화 한 폭이 그려져 있고, 그림 속에는 ‘淨飯王(정반왕)’이라는 금색의 글자가 쓰여 있다. 

[도판 13] <석가탄생도> 속 꿈 이야기를 전해 듣는 정반왕, 조선 전기, 일본 혼가쿠지(本岳寺) 소장, 사진 유근자

태몽 이야기를 듣는 정반왕과 달리 등을 보이고 있는 정반왕이 있다. 아들 싯다르타의 탄생과 함께 많은 보석이 땅속으로부터 저절로 솟아났다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정반왕이다[도판 14]. 그는 주위에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보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보석이 든 항아리 위에는 ‘寶蔵自出(보장자출)’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도판 14] <석가탄생도> 속 싯다르타의 탄생과 함께 보석이 저절로 솟아나는 ‘寶蔵自出(보장자출)’을 바라보는 정반왕, 조선 전기, 일본 혼가쿠지(本岳寺) 소장, 사진 유근자 

이 외 출가 장면 속에도 정반왕이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아들의 출가 소식을 전해 듣고 눈물을 닦고 있는 외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호암미술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기획전(2024.3.17~ 6.16)에 전시 중인 일본 혼가쿠지(本岳寺)에서 온 팔상도 속에서 직접 찾아보기를 권한다.

간다라 불전미술에서는 아들에게 절을 하는 정반왕을 표현했고, 중국 불전미술에서는 임종을 맞은 아버지를 찾아뵙고, 아버지 정반왕의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모습을 강조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모니불의 탄생과 출가 관련 에피소드에 정반왕을 등장시켰는데, 조선시대 왕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전파된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해 새로운 불교를 탄생시켰다.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표현한 불전미술도 불교의 정착 과정과 같은 흐름을 보인다. 불전미술 속 정반왕의 모습도 인도, 중국, 우리나라의 왕 모습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유근자
동국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불교미술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 강원도·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과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한 간다라 불전미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공저), 『치유하는 붓다』(공저)가 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