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十牛圖] 목우도牧牛圖 소를 잊고 그 잊음마저 소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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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十牛圖] 목우도牧牛圖 소를 잊고 그 잊음마저 소멸하다
  • 윤희조
  • 승인 2024.02.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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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선사의 목우도

선불교에서는 수행의 차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선불교 수행을 어렵게 여긴다. 선불교는 수이불수(修而不修)라는 수행법을 내세우기에 더욱 애매하게 생각된다. 이는 선불교가 전제하고 있는 원리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에 이를 포기할 수도 없다.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기에 수행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만약 닦는다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단계도 설명하지 않는다. 오로지 ‘본래 마음’을 지켜라, 드러내라고만 한다.

이러한 가운데 선불교의 계보를 이으면서 선불교의 수행 차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십우도(十牛圖, Ten Ox Diagram)이다. 십우도는 소를 대상으로 열 가지 그림으로 수행단계를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보명의 목우도는 곽암의 심우도와 함께 대표적인 선불교의 수행도(修行圖)로 꼽힌다. 두 수행도 모두 열 개의 그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둘 다 십우도라고 부를 수 있다. 둘 다 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하나는 심우도(尋牛圖, Finding Ox Diagram)이고, 하나는 목우도(牧牛圖, Taming Ox Diagram)이다. ‘심(尋)’과 ‘목(牧)’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소를 찾는 것이고, 하나는 소를 기르는 것, 길들이는 것이다. 기르는 것은 길들이는 것과 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우도에서 찾는 소는 ‘본래 마음’이라고 한다면, 목우도에서 길들이는 소는 ‘번뇌’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소를 공통적인 대상으로 하지만, 심우인지, 목우인지에 따라서 소의 상징이 달라지게 된다. 

목우도에는 2종류가 있다. 청거 호승(淸居皓昇)선사의 목우도송 12장과 보명선사의 목우도송 10장이 있다. 청거의 목우도송은 일부만 현존하고 전체는 전해지지 않는다. 목우도의 지은이인 보명(普明)은 송나라 때 섬서성 보계 태백현 태백산에 상주했다고 하나, 생몰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시대순으로 보면 청거–보명–곽암의 순이라고 한다(장순용, 『선이란 무엇인가』(세계사, 1991), p.114). 이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보명의 목우도 원문은 『만속장경』의 「신각선종십우도(新刻禪宗十牛圖)」를 따른다.

 

①  미목(未牧)

첫 번째 목우도는 미목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상태의 소를 보여주고 있다. 

生獰頭角恣咆哮(생영두각자포효)   

犇走溪山路轉遥(분주계산로전요)   

一片黑雲横谷口(일편흑운횡곡구)   

誰知步步犯佳苗(수지보보범가묘)   

흉악하게 생긴 머리뿔 가지고 멋대로 울부짖으며 

산과 계곡을 분주하게 쏘다니니 길은 점점 멀어지네.

한 조각 검은 구름 계곡 입구에 걸리니

걸음걸음이 좋은 싹을 밟는 줄 누가 알리요.

소는 흉악하게 생긴 뿔을 가지고 마음대로 울부짖으며 산과 계곡을 분주하게 길 아닌 곳을 멋대로 쏘다니고 있다. 소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헐떡이며 울부짖는다. 게다가 소가 있는 산과 계곡에 검은 구름까지 끼어서 앞을 분간하지 못하기에, 소가 내딛는 걸음걸음에 싹들은 밟혀 죽어 나간다. 

소 자신도 사납고 분주하지만 주변의 좋은 싹 역시 짓밟고 있는 것이다.

미목의 야생 상태 소는 번뇌로 가득한 범부의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번뇌로 가득한 마음은 사납고 흉악하고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다. 번뇌로 인한 괴로움으로 울부짖는다. 그리고 이러한 번뇌의 구름으로 가려져 있기에 그 걸음걸음은 선근(善根)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조그마한 선근도 자라지 못하게 밟아버린다. 

첫 번째 목우도를 보면 소는 번뇌와 함께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번뇌라면 마지막 목우도에서 소는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소를 본래 마음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본래 마음은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사라진 가운데 드러나는 마음일 진데, 아직 번뇌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그러기에 소는 번뇌와 함께하는 마음, 즉 객진번뇌를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범부의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② 초조(初調)

두 번째 목우도에서 목동은 소의 코에 코뚜레를 꿰려고 하고 있다. 

我有芒繩驀鼻穿(아유망승맥비천)   

一廻奔競痛加鞭(일회분경통가편)   

從來劣性難調制(종래열성난조제)   

猶得山童盡力牽(유득산동진력견)

내가 가지고 있는 코뚜레로 쏜살같이 코를 뚫고 끈으로 

한 번 돌리자 날뛰고 다투면서 아파하지만 채찍질 가하네.

이전의 나쁜 성질 제어하기 어려우니

오히려 목동은 힘을 다해 잡아당기네.   

목동이 코뚜레를 하는 모습이 생생히 기술돼 있다. 꼬챙이로 코를 뚫고, 뚫린 코 사이를 노끈으로 걸어서 한 바퀴를 돌린다. 반항하는 소와 급하게 다투면서 아프게 채찍질을 가한다. 소의 야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라, 목동은 온 힘을 다해 코뚜레를 잡아당긴다. 소는 이제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필자의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할아버지께서 코뚜레를 하셨다. 코뚜레용 나무를 불로 둥글게 휘게 만들고, 끝을 뾰족하게 깎으셨다. 뾰족한 코뚜레 나무로 코 사이를 뚫고 끼우셨다. 처음 코뚜레가 살을 뚫고 들어갈 때 소의 공포스러운 눈망울이 아직도 생각난다. 소의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코뚜레를 풀지 못하고 이를 쥔 목동에게 좌지우지되는 출발점이 된다. 

번뇌의 입장에서 보면 열성(劣性)으로 표현되는 번뇌를 처음 다룰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급하게 시간을 다투면서 또한 아프게 채찍질해 가면서 준비한 꼬챙이와 노끈으로 코를 뚫어야 한다. 여전히 사납고 흉포한 성질을 부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쓰면서 반항할 것이다. 모든 힘은 목동만이 쓰는 것이 아니라, 소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처음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③ 수제(受制)

이제 코뚜레는 꿰어졌고 소는 목동을 따른다. 

漸調漸伏息奔馳(점조점복식분치)   

渡水穿雲步步隨(도수천운보보수)   

手把芒繩無少緩(수파망승무소완)   

牧童終日自忘疲(목동종일자망피)  

점점 조복하면서 날뛰고 치달리던 것 그치고

물 건너 구름 뚫고 걸음걸음 따르네.

손으로 고삐를 잡고 조금도 늦추지 않고

목동은 종일토록 저절로 피곤함으로 잊네. 

소는 조복하기 시작하고 더 이상 날뛰지 않게 된다. 코뚜레가 꿰어진 이상 소는 반항하는 것이 고통만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목동은 코뚜레를 꿸 때처럼 온 힘을 다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목동이 고삐를 늦추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날뛰지 않지만 언제든 열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번뇌를 조복받기 시작했고 날뛰던 것은 그쳤고, 목동을 따라서 걸음걸음을 따라가고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번뇌는 언제든지 올라올 수 있다. 그러기에 번뇌를 조복하려는 노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더 이상 처음 번뇌를 조복할 때처럼 힘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방심할 수 없는 상태다. 목동에 의해서 번뇌가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지 아직 자발적으로 번뇌를 다스리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자발성이 드러나게 되는 계기를 네 번째 목우도에서 볼 수 있다.

 

④ 회수(廻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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