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가 된 별님, 북두칠성] 절집의 칠월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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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가 된 별님, 북두칠성] 절집의 칠월칠석
  • 구미래
  • 승인 2022.07.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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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칠석명절, 절집의 칠성기도
밀양 만어사 삼성각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으로, 북두칠성(北斗七星), 즉 칠성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칠성을 단독으로 모신 전각을 칠성전(七星殿) 혹은 칠성각(七星閣)이라 한다. 칠성, 나한, 산신을 한 건물에 모실 때는 보통 삼성각(三聖閣)이라 한다. 이 경우도 칠성이 중앙에 위치한다. 칠성각은 금륜전(金輪殿), 북두각(北斗閣), 북극전(北極殿) 등 다양한 이름으로 모시기도 한다.

‘칠’월 ‘칠’석에 만나는 이유

음력으로 7월 7일은 별들의 날이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인 칠성신을 섬기는 날이요, 견우성(牽牛星)·직녀성(織女星) 두 별자리의 인격신이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날로 여기기 때문이다. 

칠성신앙의 주인공인 칠성신(七星神)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해와 달과 무수한 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간신앙의 기반이 돼 풍요로운 문화를 일궈온 주인공들이다. 옛사람들은 하늘이 인간의 운명을 다스린다고 믿었으며, 해와 달뿐만 아니라 별 가운데 1년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는 북두칠성을 으뜸가는 별자리로 여겨 섬겼다. 북두칠성이 신앙의 대상이 된 데는 ‘일곱 개의 별’이라는 숫자의 상징성도 중요했다. 

숫자 7은 동서양 모두 길수(吉數)로 여기는데, 그 기원은 하늘에 있다. 망원경이 나오기 전까지 인류는 하늘에 해와 달 그리고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일곱 개 천체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를 일주일의 기준으로 삼았고, 동양에서는 우주 만물의 근원인 일월(日月), 즉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을 각 천체의 이름에 대입했다. 북두칠성 또한 일곱 개로 이뤄져, 숫자 7은 하늘을 이루는 근원적인 수이자 우주의 의미를 해명하는 신성한 수로 여겼다. 그러니 칠성신을 섬기기에 가장 적합한 날도 7월 7일인 셈이다.

북두칠성에 대한 자연 발생의 신앙이 본격적인 칠성신앙으로 체계화된 데는 도교의 영향이 컸다. 도교에서는 별이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지배한다는 사상을 지녀, 북두칠성을 인격화된 칠성신으로 좌정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북두칠성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신성하게 여기는 관념이 뿌리 깊었다. 

청동기시대 고조선 사람들은 고인돌 뚜껑에 북두칠성을 새겼고,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무덤 속 천장에 북두칠성을 크게 그려 넣었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에 “김유신은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나, 등에는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다”고 했다. 일·월·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등 칠요의 정기와 북두칠성의 상징을 지녔으니, 하늘의 뜻에 따라 태어난 존재라는 뜻이다. 

또한 7수가 겹친 이날에 견우성·직녀성을 두고 사랑 이야기가 생겨나, 이날을 칠석(七夕)이라 부르게 됐다. 칠석 무렵이면 은하수를 사이에 둔 두 별이 가깝게 보여,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헤어지게 된 견우·직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라는 상상력을 펼친 셈이다. 따라서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는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만남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이날 민간에서는 칠석제(七夕祭)를 올리는가 하면, 바느질감과 과일을 차려놓고 길쌈·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길 비는 걸교(乞巧) 풍습이 이어져, 견우·직녀를 둘러싼 문화와 신앙 또한 다채로웠다. 

이렇듯 ‘별들의 잔치’라 할 만큼 풍요로운 칠석 명절이 오늘날 민간에서는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사찰에서는 칠성신께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칠성기도가 이어지고, 견우·직녀를 상징해 미혼남녀의 소중한 인연을 맺어주는 칠석법회를 치르며 전통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칠성신앙의 불교적 수용

“헤아릴 수 없이 큰 지혜와 신통력을 지니시어, 일체중생의 마음을 헤아려 갖가지 방편의 힘으로써 뭇 생명의 무량한 고통을 없애 주시고, 오래도록 천상에 머물며 인간세계를 비추어 수명과 복덕을 내리십니다.” 

칠성기도를 올릴 때 스님들이 염송하는 칠성청(七星請)의 한 구절이다. 이처럼 칠성신은 크나큰 지혜와 신통력을 지닌 가운데 특히 장수와 복덕을 내리는 수복(壽福)의 신으로 좌정해 있다.

칠성신을 모신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칠성신을 신중(神衆)의 한 존재로 수용하다가, 조선 중기부터 칠성각을 세워 독립된 신앙 대상으로 모신 것이다. 임진·병자 양난을 치르고 민중의 삶이 극도로 피폐할 무렵, 가족의 안위를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포용하고 위무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104위 호법성중의 한 분인 칠성신을 독립전각에 모시고, 신중탱화 속의 칠성신을 별도의 칠성탱화로 조성하게 된 것은 칠성신앙의 기능이 그만큼 강화됐음을 뜻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사찰의 칠성각에는 칠성을 불교적으로 수용한 일곱 분의 여래가 칠성신과 함께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칠성신이 여래의 증명을 거친 존재이자, 칠성여래(七星如來)의 화현으로 나툰 존재임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칠성각에 가면 환희심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칠성신만이 아니라, 위없는 칠여래의 자비와 위력이 함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원 신원사 칠성각
통도사 비로암 북극전

도교의 칠성신 체계는, 북극성을 자미대제(紫微大帝)라 하여 모든 복덕을 관장하는 존재로 삼았으며, 그 아래 일월신을 두고 7개의 별에 각기 이름과 맡은 바 능력을 부여했다. 반면 불교에서는 북극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월광보살을 좌우 보처로 삼고, 각각의 세계를 다스리는 칠여래를 모시고 있다. 아울러 그 아래에 도교의 칠성신에 해당하는 칠원성군을 둔다. 

이는 당나라 일행(一行) 스님이 칠성신앙으로 불교와 도교 간에 마찰이 생길 것을 염려해, 약사신앙에 근거해 칠성을 수용한 데서 비롯했다. 칠성신앙이 약사신앙(藥師信仰)과 결합하면서 칠성신이 지닌 ‘수명장수’의 기능은 한층 강화됐을 것이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에게 적합한 약을 내려 병이 낫는다면 수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치성광여래는 밝기가 한량없는 북극성의 특성을 담아 그 명호를 ‘치성광’이라 했다. 중생이 도움을 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밝은 눈으로 보고, 빛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듯 응험한다는 뜻일 것이다. 인도에서도 북극성을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 부르면서 북두칠성을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다 했으니, 북두칠성 또한 이른 시기에 호법성중의 범주에 든 셈이다. 

칠성기도는 연중 이뤄지지만, 별자리를 각별하게 여기는 칠석이면 칠성신을 찾아 가족과 자손을 위해 기도하는 전통이 깊다. “이세상에 나온사람 뉘덕으로 나왔는가. 석가여래 공덕으로 아버님전 뼈를빌고 어머님전 살을빌며 칠성님전 명을빌고 제석님전 복을빌어 이내일신 탄생하니”라는 <회심곡>의 구절처럼, 칠성신앙은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는 존재로 민간에 깊이 뿌리 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주 남장사 금륜전

 

가족 위해 올리는 칠성기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칠석이 초파일에 버금가는 사찰이 많았다. 이날 신도들이 줄을 서서 저마다 가져온 공양물을 칠성단에 차려놓고 독불공(獨佛供)으로 칠성기도를 드렸다. 칠성기도에 빠지지 않고 올리는 것은 국수, 명달이 실타래, 무명천으로 끊어오는 소창, 건미역 등이었다. 모두 가족, 특히 자식의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공양물들이다. 특히 건미역은 자르지 않은 것을 통째로 접어 올려, 명이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라는 바람을 담았다. 

이러한 공양물과 함께, 떡·과일 등의 재물을 차려놓고 스님은 가족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호명하며 수명장수·지혜총명·부귀영화를 발원하고, 신도는 절을 올리며 대대적인 축원기도를 이어갔다. 아울러 산신은 비린 것을 즐긴다고 하여 산가재나 게를 가져와 올리는 이도 있었지만, 칠성신은 비린 것을 꺼려 떡·과일 등 깨끗한 재물을 위주로 올렸다. 

법주사 아랫마을에서 만난 칠십 대의 한 할머니는 50년 전 이곳으로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가 ‘칠성 위한다’며 열심히 빌고 다녔지만 난 그런 것을 할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던 그녀가 시모가 돌아가시자 농사지은 쌀 한 말을 이고 절에 올라, 칠성각·산신각에 자식들 잘되라며 기도를 이어왔다. 그런가 하면 그곳의 이장은, 사찰에 자주 가지 못해도 칠석날과 아이가 아플 때면 어김없이 칠성각에 올랐다.

불공을 드릴 줄도 모르고 자신과 무관하게 여겼던 젊은 시절의 그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 부모가 곁을 떠나자 자연스레 절을 찾아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대물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에서 아들·며느리로 이어지며 칠성신을 섬기는 것은 자식을 향한 마음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사찰에는 칠성각을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칠석 때보다는 가족의 생일에 직접 시루떡이나 백설기를 해와서 칠성기도를 올리거나, 수시로 자식의 평안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이들이 많다. 민속신앙의 대상은 점차 마을에서 사라져갔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영험한 신에게 매달리는 인간의 심성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견우·직녀를 기리는 칠석의 민간풍습 또한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사찰에서는 국적 불명의 밸런타인데이를 대신해 칠석법회로 미혼남녀의 인연을 맺어주고 있다. ‘북두칠성의 수복(壽福)’과 ‘견우성·직녀성의 만남’이라는 의미가 자연스레 결합하여 칠석은 수복과 남녀 인연을 모두 비는 날이 됐다. 이처럼 사찰의 칠성각은 인간 근원의 소망을 풀어내는, 작지만 큰 신성 공간이라 하겠다.  

옥천 용암사 칠성단.
자연신단에서 조금 발전된 칠성단이다. 옆에 돌로 쌓은 누석단도 있다. 자연신단에서 출발해 땅을 골라 단(壇)이 된다. 여기에 글자를 새기거나 비석을 세운다. 그 뒤 건물이 들어서면서 당(堂)이 되고 전각이 된다.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이자 조계종 성보보존위원회·문화창달위원회·불교문화진흥위원회 위원이다. 불교민속 전공으로 안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 『한국불교의 일생의례』,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존엄한 죽음의 문화사』, 『진관사 수륙재』, 『절에 가는 날』, 『종교와 의례공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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