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한국의 여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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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 한국의 여신들
  • 노승대
  • 승인 2021.11.2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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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중생 품는 모성의 여신들
경남 산청 천왕사에 모셔진 마고할미. 사진 유동영.

모계사회 상징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1908년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의 빌렌도르프 구석기 유적지에서 고고학자 조지프 촘바시(Josef Szombathy)가 나체의 돌조각상 하나를 찾아냈다. 높이가 11.1cm밖에 안 되는 작은 여자 조각상이었다. 커다란 유방이 쳐져 있고 배가 불룩했으며 허리가 매우 굵고 성기가 강조돼 있었다. 얼굴은 머리카락인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으로 감싸고 있어 알아볼 수 없었다. 연대 측정 결과 2만 2,000년에서 2만 4,000년 전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밝혀졌다.

이 조각상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했다. 하지만 대체로 이 조각상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그것을 빌기 위한 신상이나 부적이라고 보았다. 선사시대 인류가 생각하던 이상적 여성상이라고 해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후 프랑스, 터키, 러시아 등 유라시아 지역 19곳에서 이와 비슷한 조각상 200여 점이 발견됐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수렵과 채취로 살아가던 구석기시대에 왜 이러한 조각상을 만들었을까? 구석기시대는 모계 중심 사회였다. 모계 중심 사회는 무리 지어 생활하는 동물 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자와 코끼리, 하이에나 무리가 대표적이다.

무리 지어 생활했던 인류도 모계 중심 사회였다. 남성은 사냥을 나갈 때마다 위험에 노출됐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의 사망률도 높았다. 병이 들면 바로 죽음이었다. 무리의 숫자를 회복하려면 여성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모계 중심 사회가 정착됐다. 
모계 중심 사회는 1만여 년 전 시작된 신석기시대에도 유지됐다. 원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됐지만, 생산량이 적었다. 종족의 숫자를 늘리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계속 무리를 통솔했다. 차츰 농경과 목축이 활성화되면서 날씨의 중요성이 두드러졌고, 이미 주도권을 가진 여성이 사제 역할도 담당하게 됐다.

1979년 중국 요녕성(遼寧省) 홍산(紅山)에서 흙으로 빚은 여성 나체상 2점이 발견됐다. 제작 연대는 5,000년 전으로 알려졌다. 유라시아 비너스상들과 형태나 상징 면에서 일맥상통한다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발견된 시대나 지역은 달라도 조각상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 나체 조각상은 1974년 한국 울산 신암리에서도 출토됐다. 높이 3.6cm에 지나지 않지만 다른 비너스상에 비해 훨씬 여성스럽고 사실적이어서 ‘신암리 비너스’라고도 부른다. 일본 아이누족 유적지에서도 같은 종류의 조각상이 발견됐다. 모두 모계 중심 사회였던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조각상이다. 1983년에는 홍산 우하량(牛河梁)에서 여신묘(女神廟, 여신상을 모신 신전)가 발견됐고, 사람 키 높이의 앉아 있는 여신상도 출토됐다.
고대 사람들은 대지의 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듯 대지가 만물을 길러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지의 풍요와 여성의 생식능력이 결부된 신격을 지모신(地母神)이라 부른다. 지모신 신앙은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신앙이다. 그래서 지모신은 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한다. 그리스의 가이아, 이집트의 이시스, 인도의 프리티비, 잉카의 파차마마 모두 지모신이다.

신석기시대 말기와 청동기시대에는 농기구의 발달로 잉여 농산물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씨족사회는 부족사회로 전환됐다. 부족 간 알력이 생기며 전쟁이 발생하자 남성들은 부족을 이끄는 주도권을 차지하게 됐다. 모계 사회는 점차 부계 사회로 바뀌어 갔다. 자연히 여성신도 남성신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신화에도 드러난다. 고조선을 이끌던 단군이 죽어서 구월산의 산신이 됐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신라의 석탈해도 죽어 토함산의 산신이 됐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산신은 여산신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는 산악이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산을 신성시해 왔고, 그 산에 좌정하고 있는 산신이 지모신처럼 여성이라고 믿었다. 중생의 아픔을 보듬고 치료해 줄 산신은 자애로운 할머니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충남 보은 속리산 에밀레박물관 삼신할미상. 노승대 제공.
충남 보은 속리산 에밀레 박물관 칠성여신. 노승대 제공.

 

한국 곳곳에 좌정하고 있는 여산신

한국의 대표적인 여산신은 단연 지리산 노고단(老姑壇)의 마고할미다. 노고단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제사터’라는 뜻이다. 신라 때부터 제사를 지낸 단이라고 하지만 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노고단에 좌정하고 있는 마고(麻姑)할미는 한국 신화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여신이자 세상을 창조한 창세신(創世神)이다. 마고할망, 마고선녀 등으로도 부른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왕건의 지시로 천왕봉 아래에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모시고 성모사(聖母祠)라 했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지리산의 중심 신단은 천왕봉으로 옮겨졌고, 마고할미는 지리성모, 위숙왕후,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 등 다양한 속칭으로 불리게 됐다. 인근 백성들은 마고할미를 친근하게 ‘천왕할매’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부산 금정산도 산신할미를 모시고 있다. 금정산의 최고봉은 고당봉으로, 정상 바로 아래 있는 고당(姑堂)이 봉우리 이름으로 굳어져 고당봉이 됐다. 이름 그대로 ‘할미당’을 뜻하는 고당은 많은 만신의 기도처다. 고당 산신할미를 보통 ‘고당할미’라고 부른다.

제주도에는 설문대할망이 있다.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이다. 할머니 몸집이 워낙 거대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다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자 할머니는 바닷물과 흙을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르며 한라산을 만들었다. 할머니의 터진 치맛자락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들은 작은 오름이 됐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경주 선도산의 선도성모(仙桃聖母)와 포항 운제산의 운제성모(雲梯聖母)가 나온다. 선도성모는 중국 황제의 딸로, 선도산에 와서 산신으로 좌정하고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한다. 운제성모는 신라 2대 왕인 남해왕의 부인으로 운제산의 산신이 됐으며, 날이 가물 때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치술령신모(鵄述嶺神母)도 기록돼 있다.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朴堤上)은 왜국에 인질로 잡혀간 왕자 미해(美海)를 찾아 왜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왕자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자신은 붙잡혀 온갖 악형을 받아 죽었다. 박제상의 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 죽은 후 치술신모가 됐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치술령 정상에 신모사(神母祠)를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경남 합천 해인사 국사단에 봉안된 정견모주 탱화.
정견모주는 가야산의 산신이자 해인사 권역을 보호하는 수호신이다. 해인사 제공.

 

조선시대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나온다. 정견모주는 가야산의 산신이자 해인사 권역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알려진다. 해인사 입구 국사단이 바로 이 정견모주를 모신 전각으로, 안에 여산신 정견모주 탱화가 봉안돼 있다.
개성 성거산에는 왕건의 조상을 낳았다는 성거산 여신이 있다.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도 여신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충주 월악산에는 영험 있는 월악신모(月岳神母)가 좌정하고 있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 여산신은 불교식 이름이 붙기도 했다. 법주사가 자리 잡은 속리산의 ‘대자재천왕’과 통도사를 품고 있는 영축산의 ‘변재천녀’가 대표적이다. 이 여신들은 원래 인도 출신이다. 인도 신화의 시바(Shiva)신은 파괴의 신으로 비슈누(Visnu)와 함께 강력한 신이지만, 불교에 들어와 지위가 낮은 호법신 중 하나가 됐고 대자재천(大自在天)이란 이름을 얻었다. 음악의 여신인 사라스바티(Sarasvati)는 불교에 수용되면서 변재천(辨才天)이 됐다. 대자재천은 하늘 세계의 하나인 색구경천의 왕이기 때문에 대자재천왕이라고도 부르고, 변재천은 여신이기 때문에 변재천녀라고도 부른다. 불교가 국교가 되고 민간 대표 신앙이 되면서 여산신도 불교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충남 공주 마곡사 산신각의 남녀 산신 탱화.
음양론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말기에는 남녀 산신을 함께 그린 탱화가 등장했다.

 

음양론 토대로 여산신을 섬기는 방법

중국의 음양오행설이 삼국시대에 전래하면서 한국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음과 양의 상호 보완적인 힘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발생시키고 소멸케 한다는 음양 이론이 모든 곳에 적용됐다. 하늘은 양, 땅은 음,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 됐다.

이 이론에 따라 만물을 잘 성장케 하려면 땅이 양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음을 상징하는 대지에 양을 상징하는 선돌을 세우거나 아예 잘생긴 남근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믿음은 국가 시설에도 반영돼, 사직단 중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신단(社神壇) 남쪽 끝 중앙에 양을 상징하는 양석(陽石)을 박아 놓았다.

여산신의 남편도 등장했다. 지리산 마고할미의 남편으로는 법우 화상과 반야가 등장한다. 이름이 불교식인 것으로 보아 불교 유입 이후에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천왕봉 성모사에는 여산신과 남자신을 같이 모시던 때도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남녀 산신을 함께 그린 탱화와 아예 암벽에 두 산신을 같이 새긴 암각화도 등장했다. 모두 음양이 조화로워야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의미에서 등장한 유물이다. 짝이 없는 여산신을 위하는 방식도 등장했다. 음양 조화를 맞추기 위해 남근석을 공양하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유물이 월악산 덕주사에 남아 있다.

월악산은 신라 때부터 나라에서 작은 제사를 모시던 산이었고 월악신모는 영험한 위력이 있었다. 고려 고종 43년(1256) 충주성을 무너뜨린 몽고군은 월악산 덕주산성으로 몰려들었다. 충주와 월악산 일대 피난민들이 산성 안으로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은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그러자 별안간 안개가 끼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스럽게 일어나더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앞뒤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던 몽고군은 이를 신의 도움으로 여겨 퇴각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도 인근 사람들은 산성 안으로 피신해 무사할 수 있었다.

자연히 월악신모에 대한 인근 백성의 믿음은 두터웠고 고려 조정에서 주관해 월악산에서 제사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관청에서 주도해 음력 정월과 10월에 제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 중단됐다.

충북 제천 덕주사의 남근석. 음양 조화를 맞추기 위해 짝이 없는 여산신에게 남근석을 공양했다. 노승대 제공.

덕주사에서 월악신모를 위해 공양한 남근석 3기는 지금 외딴곳으로 옮겨졌지만, 전에는 절 초입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연꽃 좌대 위에 서 있는 남근석도 있다. 위맹한 월악신모에게 밉보이면 큰 사달이 날 수 있으니 짝없는 여신에게 공양하며 음양이 조화롭기를 기원한 것이다.

민간에서는 남근석을 세워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고 자손을 빌기도 했다. 덕주사 남근석도 훗날 부녀자들이 찾아와 자손 얻기를 기원하는 기도처로 쓰였다. 기자신앙(자식이 없는 집안에서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신앙)과 민간 풍속이 절집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여산신에게 남근을 공양하는 의례는 법주사에도 있었다. 속리산은 여신인 대자재천왕이 머무는 곳이고 천왕봉 아래에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대자재천이 매년 10월 인일(寅日)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이해 제사 지내는데 신은 45일간 머물다 돌아간다”고 했다.

이능화는 그의 저서 『조선무속고』에 법주사 스님에게 들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여러 대중스님들이 나무로 남근을 만들고 붉은 칠을 한 후 그것을 들고 춤추며 신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근이라는 용어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남근과 비슷한 송이로 대체해 ‘송이놀이’로 부르며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다.

원래 여신에게 남근을 깎아 바치는 풍속은 해안가 동제에서 흔했고 그 제의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삼척 원덕읍 신남리 해랑당이다. 또 조선 초기 관아에서는 안의 작은 숲에 사당을 두고 수호신을 모셨으며 이를 부군당(府君堂)이라 했다. 이후에는 마을을 보호해주는 풍요신으로 모셨는데, 풍농과 자손 창성을 위해 남근을 깎아서 걸어 놓기도 해서 ‘남근을 걸어 놓은 당’이라는 뜻의 부근당(府根堂)이라고 불렀다. 기록과 사진도 남아 있다. 남근을 공양하는 민간 풍속을 절집에서 수용한 것이다.

석기시대부터 여성은 자손을 생산하고 종족을 유지하는 신성한 존재였다. 모계 중심 사회를 이끌며 주도적 역할을 하던 여성은 여신으로 격상돼 나타났다. 세월이 흘러 남성이 제사권과 왕권을 차지한 이후에도 여신은 백성들의 기도처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삼신할미, 마고할미, 고당할미, 천왕할매 모두가 이러한 여신들이다. 성모(聖母)나 신모(神母)라고도 불리는 여성신들은 앞으로도 고달픈 중생들을 안아주는 자비로운 모성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전승돼 갈 것이다. 

충남 공주 동학사 삼성각의 여산신과 산신도.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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