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와 구미 선산] 구미 선산의 유학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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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와 구미 선산] 구미 선산의 유학과 불교
  • 이지범
  • 승인 2023.09.2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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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에 서린 야은 길재의 꿈
‘야은역사체험관’에 소장된 야은 길재 초상 모사본 

경북 구미의 금오산은 5세기에 아도화상이 지은 이름이다. 아도화상이 어느 날 이곳을 지나다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 즉 태양 속에 산다는 금오(金烏)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 하여 부르게 됐다. 선산에서 보면 붓끝 같아서 ‘필봉(筆峰)’, 칠곡·인동에서 볼 적에 산릉선이 사람 얼굴 같다고 하여 ‘금오산 와불(臥佛)’이라 부른다. 다르게는 귀인이 관을 쓴 것 같아서 ‘귀봉(貴峰)’, 금릉·개령에서는 도적이 짐을 지고 내려오는 모습이라 하여 ‘적봉(賊峰)’ 등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 불렸다. 금오산이 웅장한 기암괴석으로 된 절경이라는 뜻이다. 이 초서 글씨는 16세기 중엽에 고산 황기로가 쓴 것으로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등산로 150여m를 오르면 보이는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 해동초성(海東草聖)으로 불린 고산은 “초서 필법이 신비롭고 기이해 마땅히 우리나라의 종장(宗匠)으로 삼는다”라고 근대 서예가 오세창이 평가한 인물이다. 금오산 정상에서 서남쪽에 있는 폭포 벅시소 주변의 암벽에는 신선이 사는 ‘금오동천(金烏洞天)’이란 글자도 남아 있다.

고려 후기부터 금오산은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北崇山)과 함께 남숭산(南崇山)으로도 불렸다. 1342년 원나라 순황제가 북숭산 신광사를 그의 원찰로 지정해 중창할 무렵, 금오산을 남숭산이라 하여 짝을 이뤘다. 중국의 5대 명산 가운데 으뜸인 숭산에 비겨 손색이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야은 길재

고려 개경에 알려진 남숭산이란 이름은 1390년 초봄, 야은 길재의 낙향으로 더 알려졌다. 야은 길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정치격변기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節義) 정신을 지켰다. 이는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회고가〉를 쓴 야은 길재가 한창 일할 나이인 38세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온 그의 인생사와도 직결돼 있다.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는 호와 같이 야은 길재는 금오산과 밀접한 인물이다. 그는 구미의 옛 이름인 선주(善州)와 선산의 옛 이름인 일선(一善) 지방의 ‘열 명의 철인(십철十哲)’에 의해 더욱 빛을 발했다. 그들은 선산부사였던 점필재 김종직이 1477년 선산의 자랑 열 가지를 찬탄한 시에 수록될 정도였다. 고려 말기에는 유학자들이 세상에 도가 사라졌다고 여겼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 72현’과 일부는 은둔을 통해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고 했는데, 야은 길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도은 이숭인과 더불어 고려 말 ‘사은(四隱)’으로 불린 야은 길재(冶隱吉再)는 본관이 해평으로, 경북 선산군 고아면 봉계(봉한리) 출신이다. 1386년 34세에 문과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조선 초기에 태상박사의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출사를 거부하고 금오산에 은거해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원년) 67세로 별세한 후, 1427년에 통정대부 사간원 좌사간 대부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으로 추증됐다. 사후 1741년에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그의 충절과 고매한 학덕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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