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이 곧 도이다(平常心是道)” - 페르메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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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이 곧 도이다(平常心是道)” - 페르메이르
  • 보일 스님
  • 승인 2024.04.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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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살다 보면 매일 쳇바퀴 돌 듯 출퇴근과 일과를 반복하면서 흥미나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하고 거창한 것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과연 그럴까. 만약 마조 도일 스님께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다면 단박에 죽비로 맞을 일이다. 

마조 스님(馬祖導一, 709~788)은 도(道)라는 것을 대상화해서 좇아가면 마음만 오염될 뿐, 도는 특별히 닦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만약 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다. 그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지어내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취하거나 버리거나, 속되거나 성스러움이 따로 없음을 말한다”고 설한다. 진리나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뭔가 특별한 것을 하려고 애쓰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 오롯이 마음을 모으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이다. 

물론 여기서 평상심은 단순히 일반적인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른 집중을 통해 나와 외부의 대상 세계라는 경계가 사라져서 둘이 아닌 완전히 하나가 되는 마음을 말한다. 멀리서 진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오롯이 몰입하면 진리는 저절로 드러난다. 여기 일상을 빛으로 밝게 비춰 매 순간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표현한 화가가 있다. 바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다.

 

빛으로 드러낸 일상의 경이로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또는 Jan Vermeer 1632~1675)는 17세기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델프트 출신의 화가다. 사실 페르메이르의 생애는 알려진 사실이 그다지 없어서 그의 삶을 그려내는 것은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작업이다. 훗날 미술사가들의 노력으로 극히 적은 사료 대조를 통해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결국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추측과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달리 보면 후대에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생애는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다양한 시각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그의 스승과 제자는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확실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고 현재까지도 학계의 연구가 진행 중이다. 겨우 생몰연대, 델프트 화가 조합인 성 누가 길드에 등록된 사실, 생애를 통틀어 전체 작품 수가 37점에 불과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정도는 확인된다. 확실한 건 그가 무려 열한 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그의 작업이 그리 녹록지 않았을 것임은 틀림없다. 영화에서는 하녀를 둘 정도의 집안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많은 부양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는 백성들의 일상생활 정경을 그린 작품인 장르화(genre painting)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 <진주 무게를 재는 여인>, <레이스를 뜨는 소녀>, <화가의 아틀리에> 등등의 작품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페르메이르는 빛을 이용해서 일상의 평범한 순간을 맑고 은은한 색채를 통해 특별하게 생동감을 불어넣는 마법을 부린다. 페르메이르의 시선이 거대한 서사를 담은 역사화나 성경의 내용을 표현한 종교화보다는 그의 일상을 지켜주는 주변 사물과 사람들에 머물러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페르메이르가 일상의 모습만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성서화는 물론이고 델프트시의 정경을 그린 풍경화 <델프트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페르메이르, <델프트의 풍경>(1660~1661),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페르메이르, <편지를 읽는 여인>(1662~1663),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일상이 기적이 되는 순간, <편지를 읽는 여인>

한 여인이 편지를 양손으로 조심히 쥐고 읽고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빛의 블라우스가 유난히 눈에 띈다. 여인은 임신한 듯 보이는데, 가사의 고단함을 잊은 채 편지에 오롯이 마음이 가 있다. 조금 전까지 설거지나 바닥을 닦다가 온 듯 그녀의 소매 깃은 한껏 올려서 접혀 있다.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 인물, 소품들 속에서 이러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페르메이르의 내공이 놀랍다. 그림 중앙에 서 있는 여인의 상의뿐만 아니라 의자도 청금색이다. 창가로 들어오는 빛도 의자나 여인의 상의 때문에 반사돼서인지 벽지에는 왼쪽 상단부터 가운데에 이르기까지 푸른빛이 감돌고 있다. 

아직 가사 노동으로 인한 거친 호흡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그녀는 중요한 서신을 들고 빛이 들어오는 창가 앞으로 다가선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 편지의 인사말 부분 정도를 응시하고 있다. 아직 본론이나 결론은 모르지만 한 줄 한 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듯하다. 살짝 벌린 입술을 통해 이 순간의 집중과 몰입이 잘 드러나고 있다. 아마도 먼 항해를 떠난 남편이든,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든, 혹은 전쟁터로 떠나보낸 아들이든 그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이 이 여인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이내 이 여인이 미소 짓게 될지, 눈물을 흘리게 될지, 아니면 충격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을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직전의 궁금증과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이 페르메이르의 시선에 포착되고 그것이 화폭에 옮겨지면서, 터질 듯한 긴장과 고요 그 속에 응축된 삶의 생동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사실 페르메이르가 그 느낌을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잘 잡아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빛에 의해서 일상이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의 일상은 늘 빛나고 있었다.  

 

일상의 경이로움 속으로…

페르메이르가 주변 사물들과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은 <우유를 따르는 하녀>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시선과 노동으로 단련된 팔뚝 근육에서 전해지는 집중의 느낌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고요와 숭고함마저 자아낸다. 이 장면 또한 의미심장하거나 거창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저 하녀로 보이는 한 여인이 우유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가사 노동으로 단련된 듯이 여인의 어깨나 팔뚝 또한 어지간한 남성 못지않게 강인해 보인다. 

페르메이르, <우유 따르는 하녀>(1658~166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페르메이르는 스푸마토(Sfumato, 물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리는 명암법) 기법으로 마치 한국의 전통 한지 문양을 한 창문처럼 눈부신 아침햇살을 따스하게 걸러주면서 부엌 전체에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작은 그림 속에서 창문과 구석의 바구니 아랫부분의 명암이 잘 드러내 있다. 강렬함보다는 은은함으로 빛과 어둠을 대비시킨다. 이 좁은 부엌 속에 소품은 많지 않지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빵의 질감뿐만 아니라 벽에 작은 못이 박혀 있거나 못을 뺀 흔적마저도 저마다의 역할을 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속 여인은 온 마음을 다해 우유를 따르고 있다. 행여나 따르는 도중에 두건이 눈을 가리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두건 앞을 한 겹 접어 올렸다.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았을 이 여인의 볼록한 이마가 보이고, 그녀의 시선은 우유 줄기에 고정돼 있다. 한 방울의 우유도 그릇 밖으로 흘러서는 안 되며 또한 지나치게 많거나 적어서도 안 되기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순간 여인의 마음은 오롯이 우유 줄기에 몰입돼 있어서 자신도 잊고 우유를 따른다는 생각도 없고, 근심이나 걱정 불안 등등의 잡념도 없고 노동의 고담함을 느낄 새도 없다. 오직 따를 뿐이다. 그게 전부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페르메이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도 평범한 여인을 한순간의 표정과 조그만 소품 하나만으로 비범한 여인으로 탄생시킨다. 그림 속 소녀는 마치 조금 전에 누군가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고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이내 고개를 돌려 말할까 말까 입술을 달싹이는 듯하다. 누군가는 애타게 대답을 기다리며 미세하게 떨리는 이 소녀의 입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바로 그 느낌이다. 그림 속 유난히 여인의 눈빛과 입술, 진주 귀걸이가 반짝거린다. 이 인상적인 광택을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놀랍게도 붓 터치 한 두 번으로 처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페르메이르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해 윤곽선을 뚜렷이 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은은하면서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작품에서 페르메이르가 누구를 주인공으로 한 것인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인물에 대한 페르메이르의 사랑스러운 시선만큼은 감출 수가 없어 보인다.     

 

천천히, 고요하고 평온하게…

페르메이르는 이처럼 극히 평범한 일상의 순간순간을 결정적인 순간순간으로 전환한다. 아니 우리에게 일상의 매 순간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일깨워준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페르메이르는 평범하고 익숙하거나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슬로비디오처럼 혹은 스틸 사진처럼 그 순간을 포착해 내고 삶의 경이로운 순간으로 자각하게 한다. 페르메이르는 마조 스님처럼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롯이 몰입한다면 우리의 삶을 고양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단 한 순간의 잠시 멈춤과 마음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그 충만한 삶을 느낄 수 있다. 넋 놓고 있으면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자, 특별하고 진귀한 그 무언가를 꿈꾸며 갈구하기 이전에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는 내 호흡에서부터 일상의 경이로움을 느껴보자. 마치 페르메이르가 스푸마토 기법으로 표현하듯, 숨을 천천히… 깊이… 부드럽게… 섬세하게… 반복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어 본다. 이미 나의 삶은 고요하고 평온해지며 오롯이 순간이 영원처럼 일깨워진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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