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와 구미 선산] 신라의 처음 절, 도리사 회주 법등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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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와 구미 선산] 신라의 처음 절, 도리사 회주 법등 스님
  • 불광미디어
  • 승인 2023.09.2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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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불교 1,600년의 역사가 드러났어요”
“부처님 불사는 어렵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라불교초전지 성역화를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생각했죠.”

법등 스님(도리사 회주)은 1977년 도리사 부도에서 ‘사리함과 사리’가 나오던 때를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님이 도리사의 본사인 제8교구 직지사 총무 소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부도를 경내로 옮기기로 했는데, 당시 주지 스님께서 사리가 출토하는 현몽을 꾸었어요. 그런데 막상 부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밑에 구멍은 보이는데 비어 있는 거예요. 낙심하려는 찰나, 석공이 구멍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난다고   소리쳤죠. 또 다른 공간이 있었던 거예요. 그곳에서 금동사리함이 쑥 빠졌죠.”

도리사의 역사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리함과 사리는 삼국통일 직후에 모셔진 것으로 추정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아도 스님과 모례 장자, 도리사의 1,600년 역사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난리가 났죠. 얼마나 사람이 많이 오는지 ‘가을 태조산에 불이 났다’고 표현했어요. 부도가 담장 밖에 있었는데, 주지 스님이 절 안으로 옮기려고 했죠. 그런데 당시 도리사가 돈이 있나. 서울 승가사에서 성지순례를 왔는데, 도움을 받아 좌대를 마련하고 옮기는 과정이었죠. 그 돌을 지게로 져서 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도리사 적멸보궁 사리탑. 기존 세존사리탑에서 출토된 사리를 봉안했다. 

 

낙동강 40리 길과 금오산이 보이는 도리사 서대 위쪽. 이곳에 템플스테이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명상센터’를 세울 예정이다.

고단했던 성역화 불사

당시 집권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 바로 구미였다. 대통령의 고향에서 신라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사리가 덜컥 출토된 것이다. 당연히 ‘도리사를 성역화해야 한다’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스님들은 물론 불자, 기업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성역화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성역화 추진위원회는 유력 정치인이던 이후락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 중심이 돼 구성됐는데, 정작 도리사는 객이 됐다. ‘낙동강의 물을 끌어 올려 공원을 조성한다’, 또 ‘사리탑 조성을 위해 동남아시아 답사를 다녀온다’ 등 말잔치는 요란했지만, 진척되는 일은 없었다. 현몽을 꾸었던 주지 스님은 사표를 냈고 이어 부임한 스님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법등 스님이 도리사 주지로 부임했다. 이때가 1981년 7월. 박정희 대통령도 서거했고, 4년 동안 사리탑 하나만 세워져 있었다. 주변은 온통 파헤쳐져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나. 7일 동안 기도만 했죠. 장마 기간이어서 비가 많이 왔죠. 그런데 비가 오면 새로 세운 사리탑에서 붉은 녹물이 나오는 거예요.” 

사리함 출토 시 자문을 맡았고, 사리탑 조성에 감리를 맡았던 황수영 박사를 찾았다. 

“스님, 저도 설계도면 한 번 보지 못했어요.”

그런 시절이었다. 황수영 박사의 자문을 받으니, 탑 안의 골조를 콘크리트로 조성하고 겉에만 돌을 붙인 것이었다. 또 탑의 수평을 잡기 위해 합판을 부재 사이에 끼어놓아, 비가 오면 합판이 물을 머금고 녹물을 내뿜는 상황이었다. 

스님은 성역화 추진위원회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고, 추진위원회를 해산시켰다. 4년 시절과 그만큼의 돈이 허비됐고, 불사는 온전히 도리사와 스님의 몫으로 남겨졌다. 남겨진 320만 원으로 급히 법당을 짓고, 사리탑 불사를 새로 시작했다. 무엇보다 탑 안에 모셔진 사리가 위험했다.

“어느 기업인을 찾아갔는데 ‘중들이 그러면 안 된다’면서 면박을 주지, 마을에서는 ‘젊은 주지가 또 사리 장사한다’며 손가락질하는데, 욕이란 욕은 그때 다 먹었어요.” 

스님 한 분과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녔다. 글을 쓰는 다른 스님은 1년 동안 반야심경 3,000부를 사경해 탑 밑 석함에 모셨다. 2년 넘은 시간이 걸려 조성한 것이 지금의 도리사 적멸보궁 사리탑이다. 

“길도 없지, 전기도 없지, 물도 없었죠. 도리사는 3무(無) 사찰이었어요. 옛 어른들이 부처님 불사는 어렵게 하라는 말씀을 하시죠. 그 생각이 들었죠. 그래도 나는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신라불교초전지 성역화를 내가 할 수 있어 감사하다 생각했죠.”

태조산을 오르다 보면 도리사 경내의 소나무와 공유지의 소나무는 크기와 모양, 발육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옛 시절 관계 기관에서 법으로 정해진 것이라며 소나무 벌목을 요청했으나, 스님은 거절했다. 스님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순간의 선택이 수십 년을 좌우했어요.”

 

‘우리 절’ 도리사

도리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해평면에 있지만, 선산 도리사로 흔히 불린다. 지금은 선산 지역이 구미 지역보다 인구가 적지만, 역사와 문화로 접근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부터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온다고 하죠. 불교뿐 아니라 유학도 강했던 곳입니다. 야은 길재 선생도 어릴 때 도리사에서 공부했다 그럽니다. 아도 스님은 낮에는 양과 소를 치면서 변장하고,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과 불법을 이야기했다 그럽니다. 지금도 양천골, 우천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요. 아도 스님이 목동 생활을 했던 곳이죠.”

선산은 뭐라 해도 아도 스님과 모례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리고 도리사가 그 중심이다.

“얼마 전까지 지역 사람들은 도리사라 부르기보다는 ‘우리 절’이라고 했어요. 정월 그믐날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절에 와서 다 자고, 아침 예불하고 내려갔어요. 젊은이들도 으레 왔었죠.”

물이 귀했기에 많은 양의 밥을 지을 수 없어, 마을 사람들은 부처님오신날도 전날 저녁에 올라와선 당일 아침 일찍 내려갔단다. 어느 해, 지금 일주문 자리에 있던 도리사를 알리는 아치형 현판을 철거하고 일주문을 새로 조성할 때, 일부 주민이 반대했다. 아마 종교가 다른 이들이 마을 입구에 일주문이 들어서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동네 어르신들을 모아, 설계도를 보여주면서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어르신들의 말씀이 걸작이었다.

“우리 절 앞에 이렇게 훌륭한 문을 만든다는데, 왜 반대한대요?”

그렇게 세워진 것이 도리사로 들어오는 도로 입구에 있는 일주문이다. 도리사로부터 꽤 멀리 있다. 이렇게 도리사는 마을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20년 전인가? 아마 전국 사찰에서 제일 먼저 농촌방문요양센터를 세웠을 거예요. 그것도 도리사 땅에다가. 지금도 스님이 상주하면서 4개 면의 300여 어르신을 돌보고 있어요.”

스님은 농촌일수록 지역과 사찰이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리사는 금오재가노인통합지원센터를, 구미 시내에서도 금오종합사회복지관을 2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아동을 위한 도량마을 돌봄터와 연꽃어린이집도 운영한다.

“도리사는 신라불교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지만, 근대의 선지식들이 태조선원에서 치열하게 구도 정진한 수행 공간이기도 합니다.”

 

신라불교의 등불

스님이 꽤 마음을 쓰는 일이 신라불교가 시작된 선산을 알리는 일이다. 2000년대 들어 구미시에서 예산을 들여 ‘신라불교초전지 마을’을 세워 선산을 알리고 있다. 

도리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선양 사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도 스님의 신라불교 전래 1,600년을 기념해 2016년부터 시작한 ‘헌향재’이고, 다른 하나가 ‘아도 순례길’이다. 

“향으로써 선양 사업을 하는 곳은 도리사뿐일 겁니다. 아도 스님이 향을 통해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죠? 당시만 하더라도 향은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니 신라의 왕실과 귀족들이 향의 사용법을 몰랐던 거죠. ‘아도 순례길’은 백제불교 전래지인 영광 법성포와 구미가 함께합니다. 도리사부터 신라불교초전지까지 8km 정도인데, 이 길을 걷는 거죠.”

신라와 백제의 불교 전래를 기념하기도 하고, 영호남의 화합을 매개하는 장이 될 듯하다. 올해는 10월 21일 구미에서, 내년에는 영광에서 상호 방문하기로 했단다.
스님은 또 하나, 근대 선지식들의 선맥을 도리사에서 잇고자 한다. 도리사 태조선원의 선맥을 이으며, 더불어 템플스테이 수련관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명상센터’를 세우는 것을 마지막 소임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태조선원은 1930년대 석두 스님이 주지를 하시면서 개원했어요. 운봉 스님이 조실로 오래 계셨죠. 성철 스님이 1944년 하안거를 나셨고 진제 스님도 1957년 동안거를 나셨죠. 전강 스님께서도 머물렀다고 합니다.”

한때는 태조선원에 40여 대중 스님이 있었다 한다. ‘지금이야 상하수도가 들어오지만 옛날에는 물도 없고 건물이라고는 극락전, 태조선원, 삼성각, 요사채뿐이었는데 어떻게 살았을까’ 항상 생각한다. 

“딸딸이 자동차라고 아세요? 경운기 엔진에 짐칸을 붙인 차예요. 축대나 여기저기 쓰이는 돌을 제가 딸딸이 자동차로 옮겼어요. 도리사 불사하는 동안 3대를 폐차시켰습니다. 이제 법의 등불을 잇는 마지막 수레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명상센터는 신라불교의 맥과 근대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일이 될 것이란다. 계획하고 있는 명상센터의 부지는 도리사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이다. 낙동강 40리가 보이고, 금오산 황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도리사를 ‘우리 절’이라고 불러요. 농촌일수록 사찰이 지역과 함께해야 합니다.”

 

 

대담. 류지호
정리. 김남수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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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2023-09-28 13:33:57
두 자매스님 아직 정진중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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