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인식의 방법으로서의 관조에 대해서 들려 주던 한 스님의 말이 떠오른다. 두륜산 중턱의 작은 암자에서 기거하고 있던 그 스님은 청화{淸華}라는 깨끗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분은 무슨 이야기 끝에 화두{話頭}로부터 비롯되는 선{禪}은 완전한 선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있어진 화두는 그 흔적을 지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그의 선으로의 길을 화두나 질문방식을 버리고 관조방식을 택한다고 했다. 그는 기슭의 나무들을 보고 시냇물을 보고, 바람을 따라 산 밑에서 얼어오는 작은 물방울들의 안개를 본다.
안개는 나무들을 가리고 산을 가리면서 천천히 밀어오다가 어느 틈엔지 햇빛 속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만다. 그러한 안개와 바람과 나무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그것들은 저 먼 곳의 사물과 소리들을 느끼게 하고, 저 먼 곳을 감지하는 이 자연을 보는 방법은 자신을 한없이 고요하게 하고 자연의 정일한 세계에 이르러 명료하고 신선하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그 스님은 저 먼 곳의 소리를 듣는다고까지 했다. 나는 물론 믿지 않았다. 인식을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고 사물끼리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보아온 내가 스님의 말 속에서 얻은 것이라곤 기껏해야 [본다]라는 말의 고요함과 투명함에 대한 매혹 정도였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사물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고 행복이리라. 그리고 그 기쁨은 반드시 아름다운 사물이라는 단서를 통해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과연 인간이 아름다운 사물만을 만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물이란 이미 아름답지 않은 사물을 전제로 한 것이다. 또한 사물을 의미화하는 우리들의 내부에 이미 미추의 감정이 도사려 있음으로써, 그것은 아름답다든지 추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되풀이하자면 청화스님 같이 사물을 고요하게 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고요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에게서 선악과 미추의 갈등 요소가 극복됨으로써만이 고요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여건이 놓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사물을 고요하게 볼수 있다면 이미 본다는 문제는 명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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