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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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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해설

  불립문자{不立文字}

  의학체문{義學滯文}이란, 경론의 훈고적{訓誥的} 즉 현대어로 해석 연구를 존귀하게 생각한 나머지 경론에 설한 불의{佛意}의 깨침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실지로 깨치는 불법 제일인 목적을 등한시 해 버린다는 것으로 선{禪}은 그것을 특히 꺼려, 불법을 불법 본래 종교로서의 자세에 돌아가기 위하여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표방한다.

  불립문자는 문자{文字}대로 해석하면 문자{文字, 經論}의 부정이 된다. 그런데 이 [문자를 세우지 [쓰지] 않는다는 표현은 [확연무성[廓然無聖}]과 같은 선종 일류의 ] 꼭 찌르는 자극적인 말로 참다운 뜻은 결코 문자[文字}의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학체문]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취지를 다른 표현으로 말한 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즉 깨침{佛心印}이란 경론 [敎] 밖의, 경론의 요체를 실지로 체험하려는 실천의 세계에 있어서만이 상승{相承; 傳}되는 것이라고 하는 뜻이다.

  쉽게 풀이하면 대승경전은 모두 선지{禪旨}를 설한 것이다. 이를 어떻게 문자를 세우지[쓰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다만 깨침에 이르러서만이 그 문자를 이해할 수 가 있고 깨치지 못하면, 그 문자를 이해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경론의 문자를 이해하려면 깨쳐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불교는 깨침의 교라고 하지 않는가. 경론의 문자가 모두 깨우치려고 써 놓은 것이다. 깨치지 못하면 경론의 문자는 [사문자{死文字}]가 되고 만다.

  중국의 운문 {雲門}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불입니까? 운문스님은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고 대답했다. 동쪽 산이 어떻게 물 위로 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선{禪}에서는 능히 갈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의학체문{義學滯文}]이 아니다. 글자로 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글자를 세우지 [쓰지 ] 않으면 가능하다.

  또 중국의 대주혜해{大珠慧海]라는 스님은 [경{경}은 불의 {佛意]를 전하지만 불의{佛意}를 얻지 못한다고 했다. 소위 {義學滯文}의 영역을 탈하고 {敎外}, 실지로 {別}, 불의{佛意}를 얻는 [傳], 것이 [교외별전]이다.  다음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두 귀는, 번잡한 게정{階程}을 거치지 않고 곧 자기본구{自己本具}의 심성{心性, 人心]을 철견료지{徹見了知}하고, 심성{心性}과 하나가 되는[見性}것이 성불{悟}이라는 뜻인데 요는 [확연무성]이라는 부정의 넉자는 이{화{話}]의 작자가 달마의 말을 빌려서 선종의 기본적인 입장인 [불립문자]의 취지, 정신을 극히 간명하고 강렬[强烈}하게 역설 주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 심{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물과 일체된다는 뜻이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면 밥 먹을 때 밥 먹는다고 생각하며 밥 먹는 사람은 없다. 일상 생활이 모두 이러하다.

 달마의 선사상{禪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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