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는 이래야 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나의 삶 전체가 불(佛)이요 법(法)이기 때문입니다. 인연 껏, 능력 껏의 발돋움이 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내 염원의 전부는 성실한 불교인이 되는 일이며 모색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야말로 내 능력의 한계점이며 나만이 아는 나름대로의 길입니다.
불자들이 옆 사람의 행동거지에 별로 흔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의 사정과 고충과 나름대로의 과거와 현재가 있을 것임으로 그쪽에서 물어보거나 기대여 오지 않는 한 내게는 할 말도 해줄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들잎에 잠기는 실바람만이나 한 낌새라도 인연의 가지 끝에 닿기만 하면 나의 문은 그 쪽으로 열리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불자의 마음은 항상 자(慈),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으로 활짝 열려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물리쳐야 할 것을 그 자리에 가만히 버려 둔 채 지나감도 또 하나의 받아들임이 된다는 이치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인연은 업의 소치이나 업은 시간의 작용(作用 Karitra)이니 시간마다의 내 마음자리가 짓는 업은 바로 미래의 인연이 됩니다. 그러니 선업을 지어 내일에 대비하는 책임이 나 자신에게 달렸다는 겁니다.
이 활짝 여려 있는 마음과 깨어있는 정신은 사람을 향해서만이 아닙니다. 예컨대 마당을 쓸다가 비 끝에 채인 돌이 대나무에 부딪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 했다는 향엄화상의 경우나 사찰대중을 먹이는 소임을 맡은 노승이 손수 땀 흘리며 버섯을 말리는 모습을 보고 깨우쳤다는 도원선사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을 일러 줍니다. 시방세계가 곧 무진 법계이며 만상이 실유불성인 까닭에 우리가 거기 녹아들기만 하면 우리는 진리 안에 들어앉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 원효스님은 물처럼 거침없이 흐르는 무애심을 특히 강조 했던 것 같습니다. 아득한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들어 보이신 연꽃 한 송이는 활짝 열린 가섭 존자의 심안에 던져진 부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주고받음이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활짝 열린 내 심안에 비치는 것은 외계의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비쳐진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밖으로 열려진 문은 곧 안으로의 통로이니 불교의 기초는 내 현실의 파악에 있습니다. 선방 현판에 <조안각하(照頇脚下)>라고 적힌 까닭도 도원선사가 행이(또는(行履)를 챙기라고 역설한 것도 나의 현실을 살피라는 뜻으로 새겨서 무방할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 파악이전에 사실을 존중하는 태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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