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戒)는 청정한 자기실현의 길
상태바
계(戒)는 청정한 자기실현의 길
  • 관리자
  • 승인 2007.10.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광법단

오늘은 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계가 어떤 것인가? 아마 많은 분들이 계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사실은 우리의 미혹한 생활이 속박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속박에서부터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 계입니다. 원래 계는 산스크리트어로 ‘실라(sila)’라고 하여 본래의 뜻은 ‘행위, 습관, 도덕성, 경건한 것’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행해지는 계의 뜻은 몸과 말의 ‘방비지악(防非止惡)’, 즉 그릇된 것을 막고 악한 것을 멈추게 하는 핵으로서 불교의 기본적인 실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포살할 때 항상 읽고 있는 법문에도 그 말이 나옵니다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적에, “계가 바로 그대들의 큰 스승이다. 이 계를 지키고 계를 존중하는 한 내(여래)가 세간에 더 머물러도 더 이익될 바가 없다. 계는 바로 큰 대사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는 어둠에 있어서는 밝은 등불과 같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보배와 같고, 병든 자가 나은 것과 같고, 또 멀리 간 사람이 집에 돌아온 것과 같은 평화함이 있고, 속박되고 갇힌 자가 풀려나온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이다.” 하고 계의 소중함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계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실제로 계가 그럴 만한 것입니다. 인간이 즉 우리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진리, 태양 같은 진리를 완전히 해방하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 가운데 전적으로 실현하여 우리와 우리의 국토에 완전한 청정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계의 근본은 각성(覺性)

여기 주보에 계의 열 가지 뜻이 있다고 해서 적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꼼꼼히 한 대목 한 대목 깊이 생각해보고 들여다봤습니다. 정말 계에 대해 참으로 말씀 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일반적으로 계 법문을 즐겨서 법을 설하는 데 참석해 보면, 계의 그 뿌리에 대해서 비교적 과거에 말씀하시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계의 뿌리, 계가 나오는 근원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말들이 없는 걸로 저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계는 그 근원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각성(覺性)이라 그런 것입니다. 그 근원이 각성이라는 것이어서 인간의 무한성, 절대성, 완전성, 대자유성에 대한 완전한 해방, 그것을 목표로 해서 계가 설해지고 있는 것이 근본입니다. 물론 몇 가지 다른 차별도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여기 열 가지 뜻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공감이 갔습니다.

첫째는 습근(習近)이라고 했습니다. 익히고 가까이 한다. 깨달음의 진리, 내 생명의 진리, 거짓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생명이 아니라, 늙고 병드는 생명이 아니라, 죽지 않는 생명, 불멸의 생명, 영원한 생명, 진실한 나를 익히고 거기에 가까이 가는 것, 계는 그런 것입니다.

계는 물론 지지계(止持戒)라고 해서 ‘무슨 행을 하지 말라’ 하여 멈추게 하는 계, 작지계(作持戒)라 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라’ 하는 적극성을 요구하는 계 등 두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불광에서 계 받으신 분들은 제가 철저하게 작지계 입장에서 계를 설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계는 무작위, 행(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라는 작지계 입장에서 기왕에 설명을 해 왔습니다. 그렇게 보면 습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 계의 두 번째 뜻은 본성이라고 했습니다. 본성이라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진리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 계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본성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동을 잊어버린 종교와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적인 진리는 행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행은 진리에 근거한 행의 작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 움직이는 것이 누구냐?” 했을 때 “행동이다. 움직이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행, 이것이 바로 본성입니다. “깊은 진리 자체를 묻지 말고, 그 행동 자체에서 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행동이라는 것은 형상적인 것으로만 항상 파악하고, 관념적인 한계 가운데서 논리적인 구성을 하여 이해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릅니다. 그 모두를 쉬어버렸을 때 행이 바로 그 본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청량이라고 합니다. 청량이라고 하면 시원한 뜻이 아닙니까. 무엇이 시원하다는 것일까요? 활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이 쉬지 않고 우리의 몸을 사르고 있습니다. 죽음이 거기서 오는 것입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