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명상일기] 평화에 대한 명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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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명상일기] 평화에 대한 명상 2
  • 관리자
  • 승인 2007.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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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었지만 오대산 봄은 서울의 봄과는 완연히 다르다. 차를 타고 강원도 소사를 지나 원주, 문막만 내려가도 들과 산이 푸르게 변해가는 느낌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산과 들, 곳곳에 핀 진달래꽃은 봄의 주인이 되어 손님을 맞을 단장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곳 오대산은 아직도 산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어서 겨울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지난 주에 폭설주의보까지 내린 가운데 눈이 내렸다.

그러나, 겨울 동안 내린 눈들과는 달리 산하의 모든 나무들이 희디흰 백설가루를 덮어 쓴 것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아니 하얀 튀김가루를 뒤집어썼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춥게 느껴지기보다는 포근하고 따스하게 느껴지게 한다. 눈은 왔지만 봄의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뿐만 아니라 10cm 넘게 내렸던 눈들은 햇빛이 나자마자 들과 양지바른 곳에서 즉시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아침에 보았던 설경이 오후에는 ‘간밤 꿈 속에서나 보았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온데 간데 없다.

자연이 연출하는 이 경이로운 변화를 필설로 어떻게 표현하랴?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 말 없이 왔다 말 없이 갔다 해도 부족하니 그냥 내렸다가 그냥 사라졌다고 할 밖에 없다.

이와 같이 간밤에 폭설(?)이 내렸다가 한낮이 되어 다 사라져 버리는 산천을 바라보면서 매일매일 평화를 위한 명상을 하고 있는데(이 명상은 지난 달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후부터 계속해오던 명상이다) 봉암사에 계시던 서암 큰스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를 슬픈 느낌이 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이 느낌은 무엇인가? 스님이 돌아가신 일에 대한 슬픔인가? 아니면 어떤 마음 때문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가만히 바라보니 스님을 처음 만나 뵈었던 일, 스님으로부터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받고 공부하던 일과 ‘무’자 화두를 참구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서 찾아뵙고 깨달은 바를 말씀드렸던 일이 기억난다.

그 때 스님께서는,

생사지무(生死知無)하니

생사계무(生死契無)하여

생사용무(生死用無)해라.

하시면서 생사가 본래 없는 자리를 알았으니 항상 그 자리와 계합하여 그러함을 늘 쓰고 살 수 있도록 정진해가라며 만허(滿虛)라는 법호를 내려주셨던 기억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스님께서 종정이 되셔서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종단화합을 위해서 힘쓰시다가 종단의 갈등을 물리력이 아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종정도 그만 두시고 경북 군위의 석굴암, 남해의 대방사, 봉화의 무위정사로 다니시면서 홀로 정진 수행하실 때 찾아뵈었던 기억들도 계속 지나간다.

특히, 출가사문이 아닌 재가 수행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수행자의 본분에 대해서 자상하게 일러주시고 스님께서 수행하면서 겪었던 일화들을 들려주시면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셨던 가르침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서울 정토포교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토수련원에 내려가서 스님을 찾아뵙고 공부하러 봉암사를 다니던 일은 참으로 큰 행운이고 복이었던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무위정사에 혼자 계실 때 마음 속으로 최소한 일주일이라도 스님을 시봉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과 핑계로 그렇게 하지 못했었음에 대한 후회의 마음이 한 자락 남아 있다.

그런데 온갖 기억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스라한 슬픈 마음이 왜 일어났는지를 명상해보아도 그 이유가 잘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스님께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일어난 마음은 아니다.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1년 전인가 스님께서 편찮으시다 하여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면서 여쭈었던 말이 생각난다.

“스님도 아프십니까?”

하고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께서,“수레도 오래 쓰면 낡아서 덜거덕거리는 법이다.” 하시면서 육신의 아픔에 개의치 않던 스님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았던 터라서 스님의 열반이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참으로 출가 장부로 사시면서 생사 이전의 도리를 깨달으시고 걸림 없이 살다가 가셨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더욱이 당신께서는 어디로 가시는지 아시고 열반에 드셨는데 무엇을 슬퍼할 게 있겠는가? 다만 스스로 스님을 시봉하고자 마음먹었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이 마음 한 언저리에 있었지만 이것은 후회와 아쉬운 마음이지 슬픈 마음은 아니다.

스스로 내 자신의 삶을 살펴봐도 슬픔이 일어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이 슬픔은 어디서 오는가.

본래 슬픔이라는 것은 없는데, ‘이것은 어디서 오는가.’ 이 마음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하고 바라보니 지난 이라크 전쟁의 시작으로 무고하게 죽어갈 어린아이들과 힘없는 국민들의 비극과 아픔 때문이었다. 물론 이 아픔들은 비단 이라크 사람들의 비극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싸움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지난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종식되고 모든 생명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명상을 해왔던 터이다.

그러면 스님의 열반 소식을 접하면서 왜 슬픈 기운이 더 올라왔는가. 그 이유를 더 살펴보니 스님의 열반소식을 들으면서 그 동안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명상했던 마음에, 스님께서 종단의 화합을 위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다툼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이를 위해 홀로 애쓰셨던 스님의 삶이 반연(攀緣)이 되어서 일어난 마음이었다.

하여 다시 평화를 위한 명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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