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정 고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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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정 고운 정
  • 관리자
  • 승인 200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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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손길

“평생을 고향에서 죄 짓지 않고 농사만 지었는데, 하늘이 무심하네요. 어서 죽으라고 그러나 봅니다.”

태풍 루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젖은 눈의 촌로(村老)가 폐허가 된 집과 농토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내뱉은 말이다. 그렇게 눈물을 부르던 비는 여름을 내몰고 이른 가을을 재촉했다.

처량하게 맑은 가을 햇살을 받으며 강원도 홍천을 찾았다. 시골 아이답게 시꺼멓게 그을린 사내아이 둘이 집 앞에 마중나와 있었다. 아이들을 따라 어둠이 몰려 있는 반지하의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천장엔 습기가 차 곰팡이가 슬고, 바닥엔 매트리스 하나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방에 들어서니 한눈에도 몸이 불편해 보이는 신선란(48세) 씨가 밝은 웃음으로 맞아준다. 옆에는 막 소녀 티가 나기 시작한 가희(13세)가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인다.

신선란 씨는 9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몸으로, 노가희, 노준(10세), 홍혁기(10세) 그리고 학교를 휴학하고 어린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홍수정(20세), 그렇게 네 명의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다. 네 아이 중 혁기와 수정이는 신선란 씨의 자녀이다.

“예전에 식당을 했었어요. 장사가 잘 되니까 돈 버는 재미에 욕심이 생겨, 전혀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일을 했어요. 그러다 덜컥 혁기가 생겼는데 쉬어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몸을 풀고 장사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결국 그 때 무리한 것이 원인이 되어 혁기를 낳고 쓰러져 왼쪽 몸을 쓰지 못하게 됐어요.”

신선란 씨가 쓰러지자 가장 큰 변화는 남편에게서 왔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고 사업을 한다면서 그 동안 벌어놓은 돈을 물 쓰듯이 쓰기 시작했다. 남편의 거짓말과 눈속임은 계속되었지만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이 가만히 누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의 외도는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채워주지 못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아이들마저 내팽개치고 따로 살림을 차린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았다.

생활비마저 주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보조금이라도 받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무작정 시댁으로 들어가 시어머니께 이혼을 해주지 않으면 아이들과 함께 그 곳에서 살겠다고 엄포를 놓자 그제서야 이혼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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