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을 될 수 있으면 성스럽게 하려는 것이 종교 철학이요, 윤리가 아닐까.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 하건, 악하다 하건, 그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 성스러운 방법이 되건 아니면 그 본성을 교정하여 성스러운 방향으로 가려 하건 지극히 선한 곳에 정착하겠다는 귀결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성이 선하던 악하던 자성의 본체가 여여한 실상이요, 그것이 법체의 진실이며,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의 마음 속에서 지어지는 것이라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선악 예정(穢淨)적 대칭을 초월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인과 범인이 다를 것이 없고 다만 깨달음과 미혹함의 차이 뿐이다.
성인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말과는 큰 차이가 있다. 누구나 성인 또는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범성불이(凡聖不二)의 진의는 무한의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보다 더 적극적이요, 진취적인 가르침이 분명하다.
흔히 분수에 평안하여 만족함을 알라 하나 그것이 실천되지 못하는 것은 분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수 그 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평안할 수 있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만족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 분수라는 말을 자성본체의 여여한 실상으로 이해하면 어떨 것인가.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분수가 있고, 나무는 나무로서의 분수가 있을 것이다. 나무는 제 분수를 알기에 항시 말없이 평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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