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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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빛
  • 관리자
  • 승인 2007.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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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손길

지난 겨울, 20년 만의 폭설이 내리고 혹한이 계속되더니, 이번 여름에 접어들어서는 90년 만에 찾아든 가뭄으로 인해 농민들을 비롯한 온 국민의 가슴마저 타들어 갔다. 겨울엔 그토록 많은 눈이 내리더니 여름엔 비 한 방울 구경할 수 없다니, 참으로 자연의 변화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일은 어떠한가?

가뭄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여름 한낮, 바닥이 드러나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는 서울 상계동의 하천을 따라 김승기(73세) 할아버지 댁을 방문했다.

할아버지는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뽑아놓았던 선풍기 전원을 꼽으시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할아버지는 시각 2급 장애인으로 현재 국가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생활실태조사서를 보니 뜻밖에도 학력이 대졸로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어떤 분야를 전공하셨냐고 물어보았다.

“지나간 일들은 달리 할 얘기가 없어. 자유당 시절, 세상이 하도 뒤숭숭해서 남의 눈치 보기 싫어 법학을 공부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가 않았어. 시험에 한 번 낙방하고서는 정내미도 떨어지고 내가 갈 길이 아닌 걸 알았지.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대라 우선 돈을 벌어야겠기에, 그 때부터 다른 일들을 찾았는데, 경험이 없어서인지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거야.”

할아버지는 친구와 함께 당분(감미료) 사업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사업 실패 후 재기를 노리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사전을 보는데 갑자기 글씨가 흰 건지 검은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해보니 백내장과 교감신경의 마비로 인해 수정체가 뿌옇게 혼탁해져 물체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할아버지의 계획은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급기야 왼쪽 눈이 실명이 되었고, 1987년 눈을 빼게 되어 지금은 안대를 하고 다닌다. 오른쪽 눈도 거의 실명에 가깝고 겨우 명암만 구분할 수 있는 상태다.

“눈이 아프고 나서 친구들이 슬금슬금 나를 피하는 거야. 그 때 ‘내가 세상을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친인척들도 멀리 하게 되고 결국엔 떠나야겠구나 싶어, 모든 연락을 끊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이 곳으로 와서 지금까지 살게 된 거지.”

할아버지는 아직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총각이시다.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느냐고 물으니, “글쎄, 나도 내가 결혼을 안 한 건지 못한 건지 잘 모르겠네.” 하시며 옅은 미소만 지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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