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벌 헤진 옷으로 백년을 지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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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벌 헤진 옷으로 백년을 지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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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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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 ~ 1376)

무신(武臣) 정권이 몰락하고 사실상 원나라가 지배하던 고려말, 불교계는 권력과 함께 급류를 타고 있었다. 나옹 혜근 선사가 활약하던 고려말의 불교계는 선풍의 회복을 기치로 개혁을 이끌던 수선사(修禪社)가 퇴조하고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있었다. 물론 불교계 일각에서는 정토 신앙을 내세우며 민중과 함께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계의 큰 흐름은 민중들에게서 배척을 당하고 있었다. 권문 세족과의 타협으로 인한 종파간의 갈등, 부의 축적, 잦은 불사로 인한 폐해 등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출현한 나옹 혜근 선사는 보수 기득권 세력과 진보 개혁 세력 사이에서 고뇌한 고려 말의 대 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사는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선관서령(膳官署令)이라는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20세에 공덕산(功德山) 묘적암에서 요연(了然) 선사를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1344년 25세 되던 해 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

1347년 원으로 유학가 인도 출신 지공(指空) 대사 문하에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지공 대사는 가섭 존자의 108대 법손이라 하여 ‘서천(西天) 108대 조사’로 추앙받던 고승이었다.

후에 정자사(淨慈寺)로 가 임제종 18대 조사인 평산 처림(平山 處林) 대사의 법을 이어받고, 불자(拂子)를 전수받았다. 이후 명주의 보타락가산, 무주 복룡산 등지를 돌며 선승들과 법을 나누었다. 1355년에는 연경(燕京)에서 원 순제(順帝)의 명을 받아 광제사(廣濟寺)에서 주석하였으며, 황태자로부터 금란가사와 상아로 만든 불자를 받기도 하였다.

1358년 귀국한 선사는 오대산 상두암(象頭庵) 등에서 머물다가, 1361년 공민왕의 청을 받아들여 신광사(神光寺), 청평사(淸平寺), 회암사 등지에서 주석하였다. 이후 보암(普菴) 대사가 원나라에서 지공 대사의 가사와 영골(靈骨)을 모셔와 회암사에 봉안하였다.

1371년 선사는 왕사(王師)가 되어 수선사(송광사)의 주지로 가 있다가, 다시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불법을 크게 일으키니 수도 개경과 인근 백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우왕은 백성들이 생업을 놓는다는 명분 하에 선사를 경상도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로 보내었다. 그러나 선사의 밀양행은 당시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 사이의 알력 결과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선사에 대한 개혁 세력의 견제로 해석된다.

아무튼 선사는 내키지 않는 발길을 옮기다 5월 15일 여주 신륵사에서 법랍 37세, 속랍 57세로 입적하였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며, 문하에 환암 혼수(幻庵 混修), 무학 자초(無學 自超) 등이 있었다. 현존하는 저술로는 『나옹화상 어록』 1권과 『나옹화상 가송(歌頌)』 1권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가송』 가운데 선시(禪詩) 몇 수를 소개한다. 대선사이자 왕사로서 큰 자취를 남긴 선사의 시에서는 선사의 수행 가풍을 엿볼 수 있다. 원문은 『한국불교전서』 제 6책 730 ~ 752쪽에 걸쳐 실려 있다.

산거(山居)

발우 하나, 물병 하나,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 들고

깊은 산에 홀로 들어가 되는 대로 지내노라

대바구니 들고 나가 고사리를 캐어다가 뿌리째 삶나니

누더기 옷으로 지내는 일이 아직은 서툴도다

내 진공(眞空)을 깨닫고 본래 적정의 경지에 들어1)

바위 사이 돌을 베고 누워 한가로이 잠을 잔다

누군가 문득, 어떤 일이 기특하냐고 물으면

‘한 벌 헤진 옷으로 백 년을 지내노라’고 답할 뿐이로다

솔 나무 보이는 창에는 온 종일 세상 번잡함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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