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광명을 만인의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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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광명을 만인의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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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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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큰스님의 생애와 사상

1. 소년기(少年期)의 회의

속명은 고병완(高秉完). 1927년,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내리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집안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자매 사이에 화목하고 공부를 잘하는 소년이었다. 농촌의 초등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소도시 오산의 초등학교 5학년을 월반을 해서 전학을 한 것으로 보아서 학교성적이 매우 우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집에서 3km나 떨어진 학교를 병약한 몸으로 걸어서 다녔음에도 월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왕성한 독서욕(讀書欲)의 보람이었다. 어릴적부터 고병완 소년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과 혼자서 공부하는 독학(獨學)이 몸에 배었다.

이러한 소년 고병완은 형이 죽자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외동아들이 되었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점차 가세(家勢)가 기울고 오래지 않아 부친께서 타계를 하시어 병완 소년은 상급학교 진학을 단념해야 하였다. 그러나 고병완 소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어느새 책을 읽지 않으면 하루도 산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된 그는 통신강좌를 통해서 중학교 과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학제는 중학교가 6년제였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을 합한 것과 같았다. 이 6년 과정을 3년에 마쳤다. 그가 6년 과정을 3년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의 독서열과 독학으로 공부를 해내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겨우 16세 때였다. 중학교 과정을 마친 16세의 소년은 고바야시 광업소(小林鑛業所)에 정식 사무원으로 입사를 하고 사택(社宅)도 제공받는다.

이로써 16세의 소년은 어엿한 가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타계하고 가세가 기운 이후에 모처럼 찾아온 풍요였다. 그러나 이 소년 가장은 그 풍요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생활이 나아지자 그의 독서욕은 더욱 왕성해졌다.

그는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보고 탐닉하듯이 책 속에 빠져들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주경야독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병약한 아들의 그러한 주경야독이 아들의 건강을 해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으려고 밤을 새워가며 읽느냐고 걱정을 하면,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한방 가득히 읽을 것입니다.”하였다.

고병완 소년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했다. 형이 죽자 그 충격을 삭이기 위해 카톨릭에 입교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따라 카톨릭 에 입교한 그였다. 그는 자라면서 평소에 부모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그가 독서에 있어서만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책을 읽었다. 철학, 역사, 법률, 경제 등 사회과학 분야와 물리학, 수학, 농학 등 자연과학 분야를 넘나들었다. 왕성한 지식욕(知識慾)은 그로 하여금 잡식성 독서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차츰 청년기에 들어서는 그는 독서를 통해서 갖게 되는 사유(思惟)가 깊어지면서 전쟁에 휘말린 식민지 청년의 민족의식이 눈을 뜨게 되고 삶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회의와 민족의식은 그의 독서를 잡식성에서 벗어나 인생의 무브멘트를 전제로 하는 체계를 갖춘 지적(知的) 추구의 방향으로 전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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