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봉종밀선사와 배휴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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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봉종밀선사와 배휴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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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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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단(18).都序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3권에 종밀선사에 관하여 들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배휴와 소상공과 사산인과 온조상서 네 사람이 종밀의 설법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가운데 사산인(史山人)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명문대가의 출신이며 종밀은 이들 권력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밀은 당시의 권력자들과의 교류가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政僧)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통감(通鑑)」이나 「구당서(舊唐書)」또는 「송고승전(宋高僧傳)」등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훈(李訓)과의 관계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문종의 태화(太和) 9년(835) 11월 21일 공모자 정주(鄭注)와의 관계를 끊고 단독으로 환관 구사량(仇士良)등을 주살하려다 실패한 이훈은 환관의 부하들한테 반격을 당하여 종남산 초당사의 종밀 스님에게 몸을 의탁하여 숨어 지낸다. 이때 사중의 대중들이 심한 반대를 했는데 종밀은 그 반대에도 무릅쓰고 이훈의 머리를 깎아 신분을 승려로 가장시켜 머물게 한다. 그 후 환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종밀에게 죄인을 은익 시켜 준 죄를 문책하게 하자 종밀은 태연자약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와 이훈과는 친한 사이요. 그리고 이훈의 역모사실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가 내게로 온 이상 나는 그를 구원해야만 했소. 나는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 불교는 자비를 으뜸으로 삼소. 따라서 고난에 처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나의 의무요. 만약 범인을 은익 시켜준 죄로 죽이려 한다면 나는 그 죽음을 달게 받으리다.』

  이때 환관의 사자(使者) 어홍지는 종밀의 이러한 말에 감격하여 그 길로 위에 상소하여 종밀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을 주정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후의 역사가들은 종밀의 그러한 태도에 대해 각기 높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종밀은 이훈과의 교제관계도 두터웠지만 누구보다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사람은 배휴다.

  배휴는 하남성 제원현의 관료귀족의 집에서 태어나 진사가 되었다. 낮에는 불교경전을 강의하고 밤에는 시부(試賦)를 일과로 하였다. 그의 가정은 대대로 부교신자였는데, 배휴 자신도 깊은 신심으로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유학자로서의 교양도 갖추었다.

  또 관료로서의 매우 유능하였는데 대중(大中) 6년(852) 동평장사가 되어 위(位)에 있기 5년, 운조법(運漕法)과 세다법(稅茶法)등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으며, 함통(咸通)초년(860?) 무렵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배휴는 발이 넓었다. 종밀과의 깊은 관계뿐만이 아니라 청량국사 증관, 대달법사 단보, 황벽선사 희운과도 사귀었다.

  특히 종밀과의 관계에서는 본서 「선원제전집도서」의 서문을 쓰고 「규봉선사비명병서(圭峰禪師碑銘幷序)」를 짓는 등 마음을 기울이는 정도가 대단하였다. 그러면 배휴가 어찌하여 종밀을 그토록 좋아하고 따랐을까.

  종밀은 교선일치(敎禪一致), 제종융회(諸宗融會)를 표방하였다. 배휴는 바로 종밀의 이러한 융화사상, 평화사상을 극히 존경하였으며 또한 배휴가 단보(端甫)와 사귀었던 것도 그가 좌가승록이라는 요직에 있었던 것만이 아니고 삼교담론(三敎談論)에 있어서 제종겸학의 학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의 사가(史家)인 찬령(贊寧)은 종밀과 배휴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갈파하고 있다.

 『그림자는 형상을 기다려 일어나고 메아리는 소리에 따라 오는  법, 종밀공(公)이 있는 곳에 배상국(相國)이 있고, 상국이 없었다면 어찌 종밀 있었음을 알랴.』

  개성(開成) 4년(839)에 청량대사 증관이 입적하고 이태 뒤에 그러니까 회창(會昌) 원년(841) 폐불(廢佛)이 시작되기 직전인 정월 초엿새 날 홍복원에서 입적하니 그때의 나이 62세였다.

   「선원제전집」과 「도서」에 대하여

  규봉종밀은 태화(太和) 7년(833) 이후 「선원제전집도서」 4권을 저술하고 당시 선종 각파들의 주장을 밝힘과 동시에 교선일치설(敎禪一致說)을 내세웠다. 즉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 서로 배척할 것이 아니요, 서로 융화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원효스님이 「십문화쟁론」을 지어 당시 불교계 각파의 배타성을 지양하려 했던 점과 동일하다. 「선원제전집도서」는 바로 이러한 의도 하에서 편찬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원제전집도서」는 「선원제전집」에 관한 총서(總序)인데 과연 「선원제전집」 100권이 편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다. 물론 현존하지도 않거니와 「선원제전집」에서 인용된 문헌들 역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이라는 어록이 있는데 그 가운데 「규봉선원전집서급본록(圭峰禪源詮集序及本錄)」이라는 대문이 나온다. 여기 「본록」은 「선원제전집」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실제 그 내용은 「도서」와 「원각경약소초」의 문장과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선원제전집」의 인용은 아니라고 본다.

  아마 종밀은 「선원제전집」 100권을 쓰려고 기획은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서문인 「도서」만을 쓰고, 실제 본문인 「선원제전집」은 저술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송대(宋代), 천태산 나계전교원에 주석하던 의적(919-987)이 「선원전(禪源詮)을 강의하였다고 「송고승전(宋高僧傳)」제7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선원집」역시 「도서」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런데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玉城康四郞>는 『규봉종밀선사는 「선원제전집」 100권을 저술하고 거기에 따른 서문으로서 「도서」 4권을 썼다. 그런데 종밀이 입적한지 얼마 후 회창의 법난(845)이 일어났는데 그때 「선원제전집」이 없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지 않으면 당말오대(唐末五代)때 일어나 계속된 법난으로 없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다만 「도서」만 남은 게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본서의 구조

  「선원제전집도서」는 모두 4권으로 이루어졌으며 대개 단행본으로 묶어 있다. 배휴가 서문을 지었는데 이 서문은 너무나 문채가 아름답고 정교하며 또 심오하기 때문에 배휴의 서문만을 보고도 어록 전체의 뜻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 권

  1. 선원제전집이란 무엇이며 선(禪)의 의미와 분류는

  2. 선(禪)의 근원으로서의 진성(眞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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