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회암사와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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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과 불교] 회암사와 이성계
  • 박현욱
  • 승인 2021.10.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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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최대 수선도량 회암사지 발굴과 청동 금탁
양주 회암사지. 왕실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도자기류와 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고려 말, 조선 초 최대 사찰로서 회암사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여말선초 최대 사찰, 양주 회암사지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는 1964년 6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됐다. 지정면적은 323,117m2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14번지다. 지정 당시 회암사지였던 명칭을 2011년 7월 28일 양주 회암사지로 변경했다.

회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의 기록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있는 점을 볼 때 12세기에 창건됐을 것이다. 회암사가 현재의 회암사지와 같은 대규모 사찰로 중창(重創)된 것은 고려 말 인도 고승 지공이 “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天竺國, 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왕사성 북쪽에 인접해 있던 사원으로 인도 불교 중심지가 됨)와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했고, 제자인 나옹이 그 뜻에 따라 대대적인 불사(佛事)를 이루면서다.

중창된 회암사의 집은 모두 262칸이고,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부처가 7개, 10척 관음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에는 태조(太祖) 이성계,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희왕후(貞熹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에 대규모의 불사를 단행해서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됐다. 조선 전기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으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기 스승인 무학 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했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다.

회암사지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이 부근에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를 비롯해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회암사지부도(보물)·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어사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맷돌(경기도 민속자료)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8개 단지로 구성된 회암사지

양주 회암사지는 문헌상 262간(間) 기록과 지표상 남아 있는 석축물로 이미 고려 말~조선 초 중요한 불교 유적으로 인식됐다. 여기에 더해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0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권역을 발굴, 조사했다. 발굴조사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됐다. 또한 왕실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도자기류와 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돼 고려 말, 조선 초 최대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회암사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의 시작은 2001년도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이 공동으로 진행한 시굴 조사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중간마다 석축을 쌓아 계단식으로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건물을 배치했다. 회암사는 석축에 의해 8개 단지로 구성되는데, 가장 남쪽의 평탄한 대지를 1단지로 명명하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2단지, 3단지 순으로 명칭을 부여했다. 이 가운데 8단지에서 2단지까지만 외곽 담장이 둘려 있어 1단지는 사실상 사역 외곽에 해당한다. 

회암사지의 5~6단지는 회암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조사 면적은 9,600m2(2,910평)에 이른다. 보광전지와 함께 중요한 건물지가 있는 6단지 지역은 단지의 남북 길이가 35.6m로 비교적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전체 지역은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보광전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지는 지표상에 노출되지 않았다. 또한 보광전지 내부뿐만 아니라 6단지 전체에 나무가 울창해 떨어진 낙엽 아래로 가끔 노출된 건물지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보광전지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설치한 철책은 보광전지가 전체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탓인지, 일부 건물지 내부에 설치되기도 했다. 보광전지 동쪽 부근에는 최근까지 사용된 관정의 흔적이 지표상에 노출됐다. 또한 6단지의 전면 석축은 대부분 토사에 뒤덮여 있었으나, 서쪽 20m가량의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석축은 지표상에 노출됐다. 5단지는 단지의 남북 길이 22.9m, 동서 길이 102.7m의 범위다. 

회암사지 1~8단지 구획도, 박현욱 제공.

 

조선의 태평성대 발원 담긴 청동 금탁 

회암사지 제2차 발굴조사 중이던 2000년 4월 23일, 보광전지 서북편 모서리 부분에서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발견됐다. 청동기에는 ‘천보산 중 회암사’로 시작하는 명문이 확인돼 발굴에 착수했고, 3년 만에 온전한 사찰명이 새겨진 유물이 확인돼 발굴단에 흥분과 긴장감이 감돌았다고 한다. 600년 전 유물이 처음으로 발굴을 통해 드러났으니 그 흥분이야 무엇에 비하랴. 이후 보광전지 북동쪽 모서리에서도 똑같은 형태의 청동기가 발견돼 이 청동기가 건물 추녀에 매달려 있던 금탁(金鐸, 작은 종에 쇠 추를 매단 기구)임이 밝혀졌다. 청동 금탁은 그 크기가 직경 약 30cm고, 높이는 약 22cm다. 금탁의 형태는 마치 서양의 종과 같이 구연부가 밖으로 넓게 벌어진 형태로, 추녀 끝에서 풍탁(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의 기능을 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냈을 것이다. 금탁 표면에는 음각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제작연대를 포함한 총 149자의 명문이 확인됐다.

회암사 청동 금탁, 박현욱 제공.<br>
회암사 청동 금탁, 박현욱 제공.
회암사 청동 금탁 상단 명문, 박현욱 제공.

- 상단 -
王師 妙嚴尊者(왕사 묘엄존자: 무학 대사)
朝鮮國王(조선국왕: 태조 이성계)
王顯妃(왕현비: 신덕왕후 강씨)
世子(세자: 방석)

- 하단 -
天寶山中檜岩寺普光明殿四校角金粧碧彩勝天宮願懸琴鐸供諸佛亦使微塵諸衆生聞聲皆悟本心佛願我承此妙良緣朝鮮之傳萬歲干戈永息國民安畢竟同緣歸覺際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명전 네 모퉁이는, 금벽으로 화려하게 꾸미어 천궁(天宮)보다 훌륭하다네. 금탁을 달아 놓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기원하며, 또한 작은 티끌 같은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부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이 신묘하고 아름다운 연기(緣起)를 받아들여, 조선의 국호가 만세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전쟁[干戈]이 영원히 그쳐서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마침내 같은 인연의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洪武 二十七年 甲戌六(홍무27년 갑술6)
功德主 嘉靖大夫判內侍府事 李得芬(공덕주 가정대부판내시부사 이득분)
施主 貞信宅主 許妙淨(시주 정신택주 허묘정)
咸陽郡夫人 朴妙湛(함양군부인 박묘담)
寧順宅主 朴氏(영순택주 박씨)
(?)城翁主 尹氏(?성옹주 윤씨)
檢校門下侍中 李崇(검교문하시중 이숭)

상단에는 왕사,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단에는 이 풍탁 소리를 들은 중생들의 깨우침과 조선의 만세의 전함을 기원하는 발원문과 함께 공덕주(‘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와 시주자의 명단이 음각돼 있다. 명문 내용으로 볼 때 조선 태조 3년(1394) 6월 공덕주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발원문으로, 검교시중 이숭을 포함해 모두 5명의 시주자 이름이 발원문에서 15cm가량 좌측에 쓰여 있다. 명문 중 몇 글자만 제외하고 상태가 양호하다.

한편 연결부는 세 개의 고리로 이루어졌고, 모두 철제다. 윗부분은 건물에 매달 수 있도록 고리못 형태로 제작돼 있다. 길이는 15cm가량이며, 고리 둘레는 3.5cm다. 중간 부분은 건물에 매는 고리못과 금탁 본체를 연결하는 부분이다. 형태는 편평한 고리로 둘레 3.5cm, 길이 12.3cm다. 금탁 본체와 연접하는 부분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하단 끝에 구멍이 있어 연결할 수 있게 돼 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청동 금탁은 건물 처마 끝에 매달아 소리를 내는 풍탁으로 총 3점이다. 수많은 파편 상태로 출토돼 1년 이상의 보존처리 기간을 거쳐 그 형태가 확인됐으며, 지름이 30cm를 넘는 큰 크기다. 청동 금탁의 성분조성과 미세조직을 분석했는데, 3점 모두 구리(Cu), 주석(Sn), 납(Pb)을 주성분으로 한다. 납이 비교적 많이 첨가됐는데, 주조성을 향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청동 금탁은 먼저 주물 틀을 만들고, 여기에 용탕(용융상태인 금속 및 합금)을 부어 본체를 만든 뒤, 정수리 부분에 철제 연결고리를 끼우고, 연결 부위에만 다시 용탕을 부어 형태를 완성했다. 중량이 무거운 납 성분이 하륜부 쪽에서 많이 검출된 점을 통해, 거푸집을 종의 모양대로 세워 놓고 정수리에서 하륜부 방향으로 주물을 부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 금탁은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 제작 주체 등 많은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고 당대 청동기 제작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임이 틀림없다. 

필자는 2011년 양주 회암사지 제10차 발굴조사에 조사원으로 짧은 기간 참여했다. 이전에 선학들이 회암사지의 중요한 부분과 그 전모를 거의 다 밝혀 놓아 비교적 손쉽게 발굴조사에 임했다. 반면, 회암사지 동쪽 사역의 범위를 확실하게 확인해주는 담장지와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동북쪽 집수정(두 개 이상의 수원이나 못)을 찾고, 사역의 배수체계를 밝힐 기초자료를 확인함으로써 나름 회암사지 유적에 대한 작은 기여를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발굴조사 이후 회암사지 박물관 개관 작업이 본궤도에 올라 2012년 10월 개관했다. 이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은 양주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서 회암사와 관련된 전문적인 전시와 세계유산을 향한 학술성과 축적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쉽지 않은 작업에 큰 성과가 있기를, 회암사지의 진정한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길 바란다. 

 

사진. 유동영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팀 선임연구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고고학과 세계유산을 배웠다. 삼국시대 백제 주거지 발굴을 시작으로 경기도 일대와 서울, 충청북도 등 한반도 중부지방을 옮겨 다니며 발굴조사를 했다. 박물관과 발굴기관에서 문화유산 수집, 발굴, 연구, 보존, 활용 등을 담당했으며, 최근에는 북한산성 성곽조사와 세계유산등재 추진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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