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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승인 2007.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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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구름처럼

공양 때마다 낡은 발우를 펼치고 밥을 담는다.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흠집이 생긴 이 발우는 나의 중노릇 햇수와 나이가 같다. 시집올 때 가져온 그릇처럼 손때가 짙게 묻어 있다. 한마디로 그 동안의 내 수행을 담은 밥그릇인 셈인데, 출가할 때 은사스님에게서 받은 삼의일발(三衣一鉢)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물건이라서 애착이 더 간다.

가사와 장삼은 새 것으로 바꾸었지만 발우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낡은 발우를 통해 수행의 미추를 비춰보기도 하고 종종 중노릇한 흔적을 읽기도 한다.

이 발우로 처음 공양을 하게 되었을 때 어느 스님이 절 밥을 헛되이 먹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 기억 속에 쟁쟁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스님의 말은 참으로 무서운 죽비의 소리이다. 그래서 중노릇은 일생일대의 도박과 같은 것이다. 수행에 철저하면 절 밥 먹은 대가를 다 하는 것이고, 그렇질 않으면 시은(施恩)의 빚만 쌓이게 되니까 말이다. "시주를 화살 받듯 하라(施者如受箭)." 한눈 팔면 화살에 상처를 입는 것처럼 바짝 정신차려 중노릇하지 않으면 출가의 길은 빚지는 삶이 되기 쉽다. 그래서 쌀 한 톨이 지니는 절 밥의 무게를 옛스님네는 칠근(七斤)으로 보았을 게다.

한 번은 이 발우를 잃어버릴 뻔했던 일도 있었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내릴 때 걸망 챙기는 일을 깜빡하고 말았다. 부랴부랴 다음 지하철을 타고 종착역에 내려 걸망을 수소문한 끝에 되찾았는데 누군가가 뒤졌는지 발우는 꺼내져 있었다. 그때 분실하고 다시 새 것으로 바꾸었더라면 지금의 발우처럼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으리라.

낡은 발우에 담아 먹는 밥맛이 더 좋다. 절 집안의 소찬 역시 낡은 그릇에 담아야 제격이다. 뭐니뭐니해도 여러 가지 나물을 섞어 비벼 먹는 맛은 발우공양을 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비빔밥은 큰그릇에 비벼야 맛이 살아나기 때문에 크기가 바가지 만한 발우는 아주 좋은 비빔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떡국이나 만둣국 같은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유리하다. 숟가락으로 몇 번 휘휘 저으면 금새 식기 때문이다. 또한 국수는 발우에 담겼을 때가 모양도 좋고 식욕을 돋운다. 밥 한 숟갈을 먹어도 내가 쓰는 그릇으로 공양을 하여야 일정한 입맛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이가 쓰는 발우로 공양하면 그 맛이 아닌걸 보면 물건에도 서로를 교감할 수 있는 어떤 기운이 숨쉬고 있는가 보다.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지금의 발우는 가볍고 내구성이 강하다. 실수로 여러 번 바닥에 떨어뜨렸으나 깨어지질 않는다. 원래는 뚜껑도 있었고, 그릇 다섯 개가 한 짝이었는데 번거롭고 꼭 쓸모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금은 그릇 네 개만 쓰고 있다.

어시발우인 큰그릇은 밥을 담는 용도 때문인지 옻칠이 벗겨진 부분이 많다. 두 번째 발우는 국그릇이며 세 번째 발우는 설거지물을 받아두는 그릇이고 제일 작은 네 번째 발우는 반찬그릇이다. 이 네 개의 그릇을 네모꼴로 가지런히 펼치고 공양하는 모습은 여법하다.

송광사의 능견난사 발우는 잘 알려진 명물이다. 조선 때에 놋그릇을 잘 만드는 장인이 있었는데 가히 신품이라고 할 만한 놋그릇을 손으로 만들었다. 하루 종일 스님들의 발우 그릇을 모형 없이 만들어도 한결같이 똑같았다. 대궐에서 임금님이 이 장인을 불러 실제로 만들게 하였다.

소문대로 가히 신품이라 칭할 만큼 뛰어난 그릇이었다. 장인이 모형대로 잘 만들어서 숙종 임금이 말하기를, "능견난사라, 능견난사라"한데서 유래되었다. 능히 보나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 현재 남아 있는 능견난사 그릇은 29개이다. 오래오래 사용하여도 물리는 법이 없는 내 발우도 능견난사 흉내는 내는 것 같다. 네 개의 그릇이 아귀가 잘 맞아 포개어도 달그락거리질 않고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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