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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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던 어머니
  • 관리자
  • 승인 2007.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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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나의 청소년기

여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동네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즈음의 학생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얘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엔 지금처럼 누구나 학교에 갈 수 있는 시대가 정말 아니었다. 흰칼라에 풀을 빳빳이 먹인 교복을 입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비록 몇 년을 입어야 하는 단벌이라 낡고 닳아서 단단하게 누벼 입었을지라도 그 옷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인생의 중반쯤 남편을 잃은 어머님은 궁한 살림살이에도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유난히 높으셨다. 그 시절에는 농사체가 제법 있는 집들도 딸아이를 모두 공장으로 또는 남의 집살이로 보내던 때였으니, 적은 식구의 식량도 걱정되는 소농가에서 자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과감한 용기와 인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동네어른들이 아들도 아닌 딸을 어려운 살림살이에 왜 학교 따위를 보내느냐고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을 어머니는 끝내 무시하고 4남매를 모두 고등학교까지는 보내셨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어머님은 벼농사일부터 가축 기르기, 채소 가꾸기 등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일을 닥치는 대로 참고 해내셨다.

내가 살던 옛 고향은 넓은 들판을 지닌 시골농촌이었다. 동네 가운데의 집들과는 달리 우리집은 신작로 도로변에 있었는데 행인들의 쉼터가 될 수 있는 큰 정자나무가 대문 밖 길 양쪽으로 두 그루 있었다. 그것은 아버님께서 먼 읍내장을 보러 다니는 다른 동네의 이웃들을 위하여 내가 아주 어릴 적에 플라타너스를 두 그루 정성스럽게 심어놓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정자나무 옆에는 화장실도 잘 지어 놓으셨다. 시골 화장실치고는 제법 반듯하게 목재를 이음하여 깔끔하게 지으셨는데 그것은 결코 생활이 넉넉해서는 아니었다.

당시 공무원으로 월급쟁이인 아버님께서 진정으로 남을 위하여 배려하는 마음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 때는 보통 삼십리 길도 걸어서 장을 보러 다녔기 때문에 우물과 정자와 화장실은 길 가는 이에게 고마운,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될 만큼 필수적인 것이었다.

우리 집 앞에서부터 약간의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그렇게 급한 경사가 지지는 않았지만 장날 같은 날은 짐을 많이 실은 우마차는 꼭 밀어 주어야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또한 시골장를 다니시는 짐자전거꾼 아저씨들은 자전거가 뒤로 넘어질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고 큰 짐을 싣고 올라가노라면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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