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나무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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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의 상처
  • 관리자
  • 승인 2007.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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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덕 칼럼

반 년 만에 마명리 뒷산에 올랐다.

온 천지가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임업시험장. 오늘은 평일이라 삼림욕(森林浴)을 하는 사람들도 입장하지 않은 숲 속에 다람쥐와 산새들만이 한가롭다. 나무들의 숨쉬는 소리, 수액(樹液)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정적이다.

'만남의 숲'까지 내려가서 바위를 뚫고 나오는 물 한 모금 마시고 발길을 오른 편으로 돌려 잣나무 숲 속을 지나 비탈진 오르막 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하고 발을 멈추었다. 지난해 가을까지 몇 해 동안을 거의 날마다 오르내기던 길인데 왜 이렇게 낯선 길 같은가?

한참동안 한자리에 서서 주위 사방을 둘러 보았다. 언덕 위에 세워진 푯말에 쓰여 있듯이 여기는 1920년에 조림한 잣나무 숲의 한자락이다. 내 나이와 동갑인 이 나무 숲은 천수(120년)대로 산다면 아직 장년기인지라 그 쭉쭉 뻗은 정정한 몸매 때문에 어디를 가도 내게는 싱싱한 회상거리였다. 그런데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은 너무나 아니었다. 나무들이 모두 병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중에 한 나무는 허리 아래 밑둥 가까운 부분이 푹 꺾이어 넘어진 채 그 상체가 길게 쓰러져서 내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 추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일까. 길을 잘못 든 게 아니었다. 젊은 기상이 넘치던 잣나무 숲이 이렇게 늙고 병든 숲으로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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