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손짓하며 부른다. 거대한 바다 같기도 하고, 깊은 산 속 같기도 한 곳으로 어서 오라고 누군가 부른다. 어쩌면 그것은 한낱 꿈에서 본 환영이나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환영도 허상도 아닌, 내가 그토록 기다린 바로 가을인 것이다. 그 가을의 붉은 입술이, 정감어린 눈빛이 나를 부른 것이다. 기지개를 활짝 켠 다음 무거운 눈까풀을 몇 번씩 깜박거리면서 창문을 여는 순간, 나는 벅찬 기쁨과 즐거움을 억누르며 긴 머리칼을 곱게 빗은 단아한 가을을 본다.
다시 전혀 새롭게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지리한 장마와 숨막힐 듯 답답한 무더위와 황량한 먼짓속을 지나왔는데도 그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하며 성숙하다. 그러나 대지에는 달콤한 젖과 꿀이 흐르고 창공에는 수 천의 별들이 영롱하게 열매 맺는 가을이라지만, 그 뒷편 그림자 속에는 끊임없는 성숙을 위한, 얼마나 많은 인고(忍苦)의 상처들이 숨겨져 있을까. 그렇기에 가을은 내게 경건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소중한 기적처럼 생각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을을 유난히 좋아하고 아껴하는, 말 그대로 가을떼기이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책상 위에는 다른 때보다도 읽을 책이 한 뼘 이상이나 더 많이 쌓이고, 달빛이 희디흰 뼛가루처럼 부서지는 밤과도 더욱 친근해진다. 모딜리아니의 목이 길다란 그림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도 이 때이다. 또한 어느 알 수 없는 먼 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면『타이스의 명상곡』을 들으며 이끼낀 심상(心像)의 거울을 부지런히 닦고, 노란 은행잎이 뚝뚝 떨어져 바람에 쓸려 갈 때면 단풍든 내 마음도 어느새 좁은 골목길을 지나 언덕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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