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의 평화모니] '관셈보살'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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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의 평화모니] '관셈보살'을 그리며
  • 윤구병
  • 승인 2016.01.0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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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매체에서 윤구병 선생의 글이 처음으로 연재됩니다. 편집부에서 ‘평화모니’를 주제어로 잡았습니다. 선생은 오랜 기간 동안 변산 지역에서 공동체를 꾸려가는 ‘농부철학자’로 알려 있습니다. 지난해 봄 간암 판정을 받으면서도 생명, 생태, 평화를 주제로 강의도 가끔 하고 계십니다. ‘평화모니’란 주제어는 지난해 가을 한 단체가 주최한 ‘석가모니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평화를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란 이야기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평화’와 ‘석가모니’를 따서 붙인 조어造語입니다. 평화平和란 단어는 부드럽고, 깊고, 넓습니다. 불교가 이 단어와 만날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궁금합니다. 이 연재는 불교와 평화를 함께 조합, 교감시켜 독자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_ 편집자 주

 

내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새벽마다 『천수경』을 읊으셨다. 아버지가 베고 자던 하얀 베갯잇에 복사꽃 빛깔 발그레한 무늬가 얼룩덜룩 묻어 있는 것도 여러 차례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허구한 날 새벽 염불을 하는 까닭도, 베갯잇을 물들이던 얼룩무늬가 왜 생겼는지도 몰랐다. 나중 나중에 철이 들고서야 깨달았다.

내 나이 여덟 살 때 6.25가 일어났다. 7월에서 9월에 이르는 두 달 남짓 사이에 아버지는 자식 여섯을 잃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그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앓다가 내 나이 열두 살 때 돌아가시고, 일곱 째 형은 어린 나이에 몹쓸 사람들 손에 주리를 틀리고 난 뒤에 마음에 병을 얻어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덟 째 형은 열다섯 나이에 구두 통을 매고 우리 식구가 6.25를 맞았던 그 무서운 서울로 다시 살 길 찾아 떠났다. 학교라고는 국민학교 3학년 다닌 것이 죄 다였다.

아버지는 정부에서 피난민들에게 날림으로 지어준 5~6평짜리 ‘난민주택’에 살면서 달랑 하나 남은 막내아들의 이부자리를 등지고 벽 쪽으로 또아리를 튼 채 낮은 목소리로 ‘천수다라니’를 하루도 빼지 않고 읊으신 것이다. 나중에야 나는 그 경의 본디 이름이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대다라니경』이라는 긴 이름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베갯잇에 찍혀 있던 불그레한 점들이 피눈물의 자취라는 것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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