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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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
  • 불광출판사
  • 승인 2015.02.2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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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휘옥과 김사업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외딴 섬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으로부터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 지도를 받으며 피나는 수행을 해 왔다. 현재 오곡도 절벽 위 폐교를 수리하여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두 사람이 그동안 학문과 수행을 통해 얻은 삶의 불교를 제시하고자 한다.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연기緣起이다. 연기는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세계 사상사의 견지에서도 실로 귀중한 사상이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형해만 남은 연기가 아니라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연기, 그 세 번째 이야기를 듣는다.
- 편집자 주

|집착을 즐기는 자 연기를 알기 어렵다
모든 것은 여러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라고 했다. 연기의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물을 컵에 부으면 물은 컵 모양이 된다. 컵 속의 물을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물은 금세 바가지 모양이 된다. 

물이 처음부터 컵 모양을 한 것은 아니다. 컵이라는 조건(인연)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컵 모양이 생겨난다. 그러나 한번 컵 모양을 했다고 해서 컵 모양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바가지로 옮겨 부으면, 다시 말해 컵이라는 조건은 없어지고 바가지라는 새로운 조건을 만나면 물은 순식간에 바가지 모양으로 변한다. 컵 모양이든 바가지 모양이든 그 조건에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고, 조건이 소멸하면 그 모양도 함께 소멸하니 연기를 잘 보여 주는 예가 된다. 

연기에 대한 이런 설명을 들으면 연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연기만 깨달으면 영원한 평안과 대자유를 얻는다고 했으니 얼마 있지 않아 곧 그렇게 될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석가모니는 연기를 깨달아 성도하신 뒤 이렇게 염려했다. “내가 깨달은 연기의 도리는 매우 깊고 어려워서, 이 연기를 설한다 해도 집착을 즐기고 집착을 기뻐하는 사람은 알기 어려울 것이며 이 진리에 들어가기 힘들 것이다.”

연기의 원리는 간단할지 모르나 거기에서 파생되는 의미는 실로 다양하고 깊다. 지금부터 연기의 이치를 통해 나의 사고가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는지, 또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하자.

| 자신의 어느 모습에도 집착하지 말라
“물은 어떤 모양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난처할 것이다. 왜 난처할까? 물은 컵에 들어가면 컵 모양, 바가지에 들어가면 바가지 모양이 될 뿐, 물 자체에 고정된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연기한 것이므로 고정된 모습이 없다. 인연(조건)에 따라 언제나 변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물에 고정된 모습은 없지만 변하지 않는 물 그 자체는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물 자체도 조건에 의존해서 생겨난 것이며 조건이 다하면 소멸한다. 물도 온도가 올라가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고 만다. 물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니 주의해야 한다.

연기한 것의 진짜 모습은 이것이라 해도 틀리고 저것이라 해도 틀린다. 물의 진짜 모습은 컵 모양이라 해도 맞지 않고 바가지 모양이라 해도 맞지 않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어느 모습에도 갇혀 있지 않으므로 어느 것에도 구속되는 법이 없다. 

물이 컵 모양을 하고 있을 때라도 결코 컵 모양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 컵 모양에 구속되어 있다면 바가지에 들어가도 순식간에 바가지 모양으로 변하지 못한다. 컵 모양을 하고 있는 바로 그때에도 컵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우리의 본래 모습도 이와 같아서 그 어떤 처지나 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그래서 때가 되면 잘살 수 있다.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는 구속되어있지 않고 자유롭다. 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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