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섬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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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섬과 같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5.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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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한 지 3년째 되는 가을이었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정오 무렵, 나와 친구는 출렁거리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회진 포구의 한 술집에서 숭어회에다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탈영병이었다. 대학 2학년 무렵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나온 후 귀대하지 않은 채 숨어살고 있었다. 그는 대학물을 먹지 못하고 섬마을에서 아버지를 도와 김 양식과 고기잡이 농사를 짓고 사는 나에게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나름으로 「사상계」를 정기구독하고 실존주의 서적을 읽은 터였으므로, 우리 이야기는 아귀가 척척 맞았고 뜨겁게 무르익었다. 친구의 입에서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았던 갈릴레오의 명언 “그래도 지구는 돈다.”를 비롯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까뮈와 사르트르 논쟁, 시지포스의 신화들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시지포스의 불안, 절대고독, 반항, 부조리의 영웅 이야기를 하고 난 친구는 불교 사상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첫마디가 “깨달으면 나도 부처다.”라는 것이었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의식이 진전하고 있는 무신론자인 나에게 그 말은 내 귀를 활짝 열리게 했다.
그 무렵 고향 마을에 목사 지망생 친구가 있었는데, 대학 3학년인 그 친구는 겨울방학 때 고향에 내려왔다. 그는 나와 만나기만 하면 신神의 존재를 놓고 박이 터지게 토론을 했다. 나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무기로 들었고, 그 친구는 성경 구절들을 무기로 들었다. 이제 나는 그 친구를 공격할 대포와 같은 무기를 얻은 것이었다. 깨달으면 나도 부처가 된다는데, 그 말은 내가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나는 흥분한 나머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 창밖에 한 스님이 지나갔다. 친구와 나는 동시에 스님을 발견했다. 친구는 술값을 외상으로 달아놓으라고 말하고 몸을 일으켰고 스님의 뒤를 따라갔다. 스님은 키가 훤칠했고, 미남이었다. 섬으로 들어가려는 듯 여객선 승선표를 구하고 있었다. 친구가 나서서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스님은 대낮부터 얼굴이 불콰해 있는 두 청년을 경계했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당시 회진 포구에는 섬에서 여객선을 타고 나온 청년들을 술집으로 끌고 가서 술을 빼앗아먹는 불량배들이 있었다. 스님은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친구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깡패가 아닙니다. 그냥 이것저것 공부하는 문학청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불교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리더니 부두 안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우리는 그를 뒤따라갔다. 그는 다방으로 들어갔고 우리와 마주 앉았다.
친구가 물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무엇이오? 그것은 신을 거부한 인간의 오만 아니오?” 스님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오만이 아니고, 절대고독입니다. 어느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깨달음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단한 학승인 듯싶었다. 친구가 물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바위덩이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는 형벌을 받은 시지포스하고 같은 사람 아니오?”
그가 말했다. 아마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임종할 때 한 말을 해주었던 듯싶다. “사람은 섬과 같다. 스스로 등불을 켜고 길을 밝히며 나아가야 한다.” 나는 석가모니를 ‘인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라고 말한 혁명적인 선지자’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바랑을 짊어지고 총총 여객선에 오르던 그 멋진 스님의 모습과 묘한 향기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이야기를 소재로 장편소설 『싯다르타』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때 그 스님의 말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님을 만난 다음해 나는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했고, 거기에서 도안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 스님을 통해 절집 음식과 풍경소리 그윽한 분위기를 자주 맛보았다. 소설가가 된 다음 나에게 비구니였다가 환속한 여인이 찾아왔는데, 그녀가 사실은 내 제자였다. 그 제자의 고백을 바탕으로 쓴 것이 『아제아제 바라아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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