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상좌가 구순의 스승께 바치던 그 정성이 극진하던 벽안(碧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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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의 상좌가 구순의 스승께 바치던 그 정성이 극진하던 벽안(碧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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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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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나의길 나의스승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무풍교(舞風橋)를 지난 일주문에 이르렀을 때 나는 눈을 들어 영축산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위에 모든 휴식이 있다고 했던 괴테의 말이 생각나고 정점에서 부터 아래로 가슴을 열고 내려 앉은 산의 풀 속이 태고의 정서를 내게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산은 이미 낙엽이 다 지고 앙상한 가지들이 허허로이 하늘을 향해 뻗고 있었다. 겨울 산은 때로 삭막한 여운 끝에 알 수 없는 적막의 위엄을 갖추고 가까이 오는 자를 압도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게다가 웅장한 전각들이 오밀 조밀 모여서 국지대찰의 위용을 드러내는 사찰 안팎의 분위기에 나는 또한번 압도당하고 있었다.

   사찰 경내에 들어 섰을 때 고색창연한 법당 건물 주위로 향긋한 향내가 풍겨 왔다. 도저히 세속적 분위기는 조금도 찾아낼 수 없는 도량 안에서 나는 내가 관람객이 아닌 입산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연신 되풀이 하고 있었다.

   엷은 햇살이 기왓골에 부서지는 따사로운 전경을 함참 동안 바라보변서 나는 영각(影閣) 마루에 앉아 두어시간을 보냈다. 늦가을이요 초겨울인 12월 중순(정확히 12월14일)의 날씨가 양지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단자처럼 생소한 경내의 분위기에 미안함을 느끼면서 나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세속에 찌들대로 찌들린 내가 선배의 소개로 수양겸 공부나 하겠다고 통도사의 암자를 찾은것은 분명히 내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였으며 어떤 정신적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무작정 속가를 나왔고 막연히 선배의 이야기에 끌려 통도사를 찾아 본것 이었다. 암자에 방을 하나 구하여 몇 달을 지내보려던 것이 잊지 못할 첫 인상의 그 분위기에 끌려 그날밤을 나는 큰절 행자방에서 먼저 온 행자들과 함께 자게 되었다.

   이튿날 새벽 대웅전 법당에서 대중스님들과 함께 예불을 드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감격이 내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이승에서의 나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때 그 장엄한 창불소리에 내 영혼이 번쩍 눈을 뜨고 비로소 영혼의 활동을 시작하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랬지 종교신앙이란 영혼의 활동이라고.

   절밥을 먹기 시작한지 달포가 지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가끔 경내에서 먼 발치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기는 했으나 정식으로 큰절을 드리고 인사하게 된것은 지금의 사형님 중 한 분의 안내 때문이었다.

   적묵당(寂黙堂: 스님이 거처하던 방사 이름)에 들어가 인사를 드렸을 때 근엄한 위풍에 눌려 기를 펴지도 못하고 있다가 금방 나왔지만 이 인연이 나중에 사자(師資)관계로 맺어 질 줄은 정말 몰랐다.

   수계식을 하기 전날 법명을 지어 내려 주시면서 사문의 길을 어떻케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소중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아직도 내 가슴에는 그 때의 몇마디 말씀이 뭉클하게 남아있다.

   “사문은 금생 한 생을 없는 셈치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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