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에 만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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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에 만난 남자
  • 관리자
  • 승인 2009.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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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손길

가을이다. 이맘때면 가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보며, 또는 진한 추억의 향기를 몰고 오는 가는 빗줄기를 보며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생각이 머무는 대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다보면 가슴 가득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든다. 독한 약물에 의지해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김혜자 할머니(71세)에게,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 꾸물꾸물 올라오는 이 가을은 더없는 아픔일지도 모른다.

“요즘 드라마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뜸 던진 한 마디에 짙은 회한이 묻어난다. 이제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며, 차마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이 고향인 할머니는 16세 때 친구의 소개로, 자신보다 일곱 살이 많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짐승이라고 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구렁이라고 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내 운명은 이미 그때 정해졌는지도 몰라요. 그 남자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갖은 협박과 공갈에 시달리다, 납치되다시피 해서 같이 살게 되었어요. 강제로 호적에 올려지고, 열여덟 살에 첫 아이가 생겼으며, 이후에 둘이나 더 낳게 되었지요. 아이를 낳기 전부터 수도 없이 도망쳤지만, 그때마다 붙잡혀 와서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아이들을 봐서라도 어떻게든 정 붙이고 살아보려 했지만,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살아지지가 않았다. 그 남자 신발만 봐도 심장이 벌벌 떨리고 숨이 막혀왔다. 그 남자의 외모를 닮은 아이들에게도 왠지 정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의 끔찍했던 세월을 견디다 못해, 스물셋에 낳은 막내가 세 살 때이던 20대 중반, 죽기를 작정하고 도망쳐 멀리 부산에 터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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