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손길
“요즘 드라마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뜸 던진 한 마디에 짙은 회한이 묻어난다. 이제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며, 차마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이 고향인 할머니는 16세 때 친구의 소개로, 자신보다 일곱 살이 많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짐승이라고 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구렁이라고 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내 운명은 이미 그때 정해졌는지도 몰라요. 그 남자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갖은 협박과 공갈에 시달리다, 납치되다시피 해서 같이 살게 되었어요. 강제로 호적에 올려지고, 열여덟 살에 첫 아이가 생겼으며, 이후에 둘이나 더 낳게 되었지요. 아이를 낳기 전부터 수도 없이 도망쳤지만, 그때마다 붙잡혀 와서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아이들을 봐서라도 어떻게든 정 붙이고 살아보려 했지만,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살아지지가 않았다. 그 남자 신발만 봐도 심장이 벌벌 떨리고 숨이 막혀왔다. 그 남자의 외모를 닮은 아이들에게도 왠지 정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의 끔찍했던 세월을 견디다 못해, 스물셋에 낳은 막내가 세 살 때이던 20대 중반, 죽기를 작정하고 도망쳐 멀리 부산에 터를 잡았다.
월간불광 과월호는 로그인 후 전체(2021년 이후 특집기사 제외)열람 하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