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그리하여 눈·코·귀·입·살갗에 와 닿는 것이 온통 반(反) 생명적이며 자비가 아니라 무자비이다. 불교 문자로 하여 오온(五蘊)이무척이나 시달림을 당하여 「개공(皆空)은 전혀 난망이고 그 성고(盛苦)가 자못 치열하다. 먹고 살기 위해 저자 바닥에 나설 적에는 물론이거니와 차분히 들어앉아 정(定)에 좌(坐)를 해보고자 하여도 온통 세사(世事)의 공해 찌꺼기들이 사대육신을 파고들어 침략해 온다. 이러한 고업(苦業)에서 쉽사리 놓여 나려하는 것이 과연 오늘의 물화사회(物化社會)에서 가능한 것이겠으며 또 합당한 것이겠는지 조차 모를 노릇이다.
흔히 하는 말로 「시골에라도 내려가 지냈으면」 「절간에라도 들어가 보았으면」 싶지만 어디를 가보아도 소잡(騷雜)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청산(靑山)에 유수(流水)는 이미 이 땅에 없게 되어서 산을 바라보고자 하여도 이미 그것은 산이 못되고 물을 찾아보고자 하여도 이미 그것은 물이 아니다. 그러니 미혹된 중생, 중생됨의 미련함 끝 간 줄 몰라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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