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불교미술] 중국편 13.용문석굴
상태바
[사진으로 보는 불교미술] 중국편 13.용문석굴
  • 이기선
  • 승인 2009.06.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편 13 . 용문석굴(龍門石窟)

용문석굴은 옛적에는 이궐석굴사(伊闕石窟寺)라고도 불리웠다. 이는 석굴이 자리하고 있는 지형(地形)에서 유래된 것이니, 하남성(河南省)의 옛 도시인 낙양(洛陽)에서 조금 떨어진 이수(伊水)를 사이에 두고 그 동서양안(東西兩岸)에 대치(對峙)하고 있는 암산(岩山)을 파서 석굴을 조성한 바 그 암산의 모습이 마치 궐(闕,門의 일종)과 같기 때문이다.

 조사기록에 따르면 석굴이 1,352개소이고 석감(石龕)이 785개소, 합하여 2,137개소에 이르러 운강석굴 보다도 석굴과 석감의 숫자가 많으나 현재 심하게 파손되었거나 상흔(傷痕)을 남기고 있다.

 석질(石質)은 석회암의 이점을 살려 섬세한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조상기(造像記) 등 문자를 새기는 일이 많이 행해졌다.

 용문석굴 은 두번의 절정기를 갖는다.

 첫번째는 북위(北魏)가 적극적인 화화정책(華化政策, 한민족 同和政策)을 수행하려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직후에 이루어진 이른바 건설시대(建設時代)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唐代)에 들어와 낙양이 동도(東都)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때, 즉 고종황제와 측천무후(690~705A.D)의 칙원(勅願)에 의해 조영(造營)된 시대가 그것이다.

 앞에 것을 대표하는 것이 유명한 고양동(古陽洞)과 빈양중동(賓陽中洞)의 석굴로 북위 석굴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후자는 봉선사동(奉先寺洞)으로 대표되며 특히 대불(大佛)을 중심으로 한 조상(造像)은 당대 조각을 대표한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하겠다.

 서기 534년 봄, 차거운 눈비가 몰아치던 날 북위(北魏,385 ~ 535)의 수도 낙양의 영녕사(永寧寺)에 있는 거대한 9층탑이 역사적인 화재로 소멸되었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구도자들에 의해 < 지상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받던 이 탑은 높이가 1,000자(尺)나 되었다 하는데 이 위대한 상징은 6세기 중국 불교의 막강한 힘과 성스러움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재(大火災)는 탑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부속 건물까지 모두 태워버리며 3개월이나 꺼지지 않았고, 마침내 모든 불씨가 다 꺼졌을 때 탁발족의 왕조 또한 멸망해버렸다. 그리하여 한때 탁발족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던 낙양도 사라지게 되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