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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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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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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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목소리

이러한 생활도 계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정이 들었던 곳을 떠나 타소로 이송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법회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어도 마음이 중요하다고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생각한 저는 불경을 독경하면서 불법대로 살아가고자 노력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기회에 내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자는 각오속에서 독방을 신청하여 [법화경] 과 [반야심경] [보현행원품]을 다시 공부하였습니다.

기도로 시작한 하루하루는 저에게 올바른 판단력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또다시 전주교도소로 온 저는 주위에 있는 법우들에게 찬불가 및 독경을 비롯하여 참회발원문을 지어서 아침 저녁으로 독경하게 하였습니다. 광덕 큰스님과 자신 부회장님께서 동국대 불경독후감 응모에 참가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졸이라는 저의 학벌로서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불교담당이신 이수복 선생님(전주교도소) 과 상의하여 필기도구를 지원받기로 약속을 한 저는 조석일과대로 실천하며 법화경을 삼독(三讀)하고 조용히 원고정리를 하였습니다. 원고 발송 후 지장보살님 앞에서 염불정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큰스님과 부회장님으로부터 일반부 입상을(1990년 12월 29일) 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더욱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과 선물도 보내주셨습니다.

상장과 부상(십만 원)을 받고보니 처음 접하는 기쁨에 저는 울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과 동료 법우님들의 기도 그리고 큰스님과 부회장님 및 불광법우님들의 지극한 기도의 힘이라고 생각한 저는 상금을 돌리기로 하였습니다. 양말을 사서 동료들에게 나눠주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요 제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도 멀었습니다. 전생과 현생에 죄악을 참회하며 공부(불법)를 계속하는 저에게 지장보살님의 현몽도 있었습니다.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참선을 하다 잠시 잠이 든 사이 지장보살님이 조용하고도 인자하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지장보살님을 친견한 저는 1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100일 기도는 자신 부회장님의 지도로 참다운 저의 모습을 찾아보는 아주 귀중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은 죄가 무거운 저는 또 다시 이별의 아픔을 맞보아야 했습니다. 자식을 이곳에 가두고 눈물로서 살아오시던 아버님과 저에게 월간 [불광] 과 [수선회보]를 보내주시던 서울 경일국민학교 박종천 교장 선생님의 별세소식은 이별의 아픔을 주었습니다. 은혜를 알면 갚아야 하는 것이 인간인데도 저는 두 분이 가시는 그 길에 참석하지 못하고 염주와 목탁을 손에 들고서 두 분의 왕생극락을 기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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