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반야심경 강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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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강의실] 반야심경 강의 3
  • 광덕 스님
  • 승인 2009.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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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지(大智), 구현자(具現者) ---관자재(觀自在)---

「관자재보살」은 구마라집(kumarajiva)역(譯)에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하는 대보살이다. 원어(原語)는「Avalokitd Svara.」관자재(觀自在)의 뜻이다. 「관세음」이라 한것은 법화경 보문품에 「혹 많은 중생들이 고뇌에 빠졌을 때 관세음보살을 일심(一心)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관(觀)하고 다 해탈을 얻게 한다.」한 것처럼 관자재보살이 「중생의 음성을 관(觀)」하는 대자비행(大慈悲行)에서 이를 이름으로 전칭(傳稱)한 것이다.

 관자재보살은 그 이름이 보이듯이 일체에 자재(自在)하다. 중생의 번뇌에 기인하는 현상에서 해탈하고 근본예지(根本叡智)에서 자신(自身)을 시현(示現)한다. 그러므로 경에는 십팔무외력(十八無畏力)과 32응신(應身)으로 현상계에 대자재(大自在) 대자비(大慈悲)의 위신력을 나툰다한다. 그러나 실로는 대지(大智) 대자(大慈) 무외(無畏)의 위신력일 뿐이다. 그것은 무한(無限)이다. 수로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관음(觀音) 위신력은 바로 구원생명(久遠生命)의 무한진동(無限震動)이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은 구름에서 벗어난 달처럼 일체에서 훤출하게 뛰어났고 푸른 하늘에 걸림없이 그 빛을 터뜰이는 태양처럼 절대 자재(自在)하다.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부르듯이 일체지자(一切智者)며 일체견자(一切見者)며 무애력자(無碍力者)다. 실로 관자재자(觀自在者)다.

 3.「보살」은 현재의 불광 시현자(示現者)

「보살」은 무엇인가 bodhi - Sattva의 준말인데 각유정(覺有情) 또는 도심중생(道心衆生)이라 번역된다. 진리를 구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수행자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도심(道心)으로 수행하는 자는 마침내 도심(道心)의 구극(究極)을 완성(完成)하게 되니 이것이 성불(成佛)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바로 미래불이며 동시에 도심(道心)의 한 표현이기도 한 양면이 있다. 미래불인 때는 오늘의 미완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도심(道心)의 표현일 때는 그에게는 이미 도심(道心)이 구전(具全)하고 있는 것이며 그 표현을 제한하고 있는 도심(道心)의 한 형태다. 이것이 오늘날 현상계에 있어서 보살의 광명적 존재를 의미하게 한다.

 보살의 칭호는 원래 부처님의 성불이전 수행자인 때의 칭호였다. 그러나 중생은 누구나 그 본성(本性)이 불성(佛性)일 진대 누구나 오늘의 수행을 통하여 성불(成佛)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오늘의 수행은 즉시 불성광명(佛性光明)의 개현(開顯)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자는 누구나 다 보살이다. 있는 곳마다 가는 곳마다 광명적 존재라 할 것이다.

 4. 관자재(觀自在)의 위력(威力)은 반야(般若)에서

 관자재보살이 어떤 경지의 수행자인가는 앞서 이미 말했다.

 그는 구세대사(救世大士)며 대비성자(大悲聖者)다. 경에는 포외급난(怖畏急難)에 빠진 일체 중생에게 능히 무외(無畏)를 베품으로 호(號)를 시무외자(施無畏者)라 한다. 하였고, 고뇌중(苦惱中)에 있는 이에게 능히 의호(依호)가 되니 중생은 모두가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에 두어라고 말씀하신다.

 관세음보살의 이와 같은 위신력은 어떻게 하여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심심(甚深)한 「반야바라밀타」를 수행하는 데서 온다고 가르치신다. 그렇다. 관자재보살도 이 반야바라밀타로 「관자재」를 이루었고 우리도 또한 반야바라밀타를 수행하여 이 위신력을 이룰 것이며 일체 불보살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5. 반야를 수행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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