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의 현장] 포교현장 부천 석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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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현장] 포교현장 부천 석왕사
  • 편집부
  • 승인 2009.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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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음지에는 잔설이 흩어져 있고 봄바람에 손등 튼다는 말을 실감하듯 싸늘한 바람은 체감온도를 떨군다. 이따금 바람이 불때마다 천막이 벌렁거린다. 천막안, 향내음이 짙게 깔리고 많은 청중이 모여 어느 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냉기가 감돌기는커녕 법사의 열변에 늦추위도 잠시 주춤하고 있다. 변변치 못한 자리, 천막법당, 많은 대중의 모임, 법사스님은 안쓰럽다 못해 고마운 마음에서 더 열변을 토했는지도 모른다. 눈빛은 강한 의지에 찬 듯 잔잔한 미소와는 대조적으로 빛을 발한다.

창건주 고산스님

1976년 초봄의 법회 장면을 연상해 보았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보운산 기슭의 석왕사(釋王寺)는 처음 시작이 천막부터였다. 창건주 고산(杲山) 큰 스님 당시 10년전의 일이다. 오늘날의 석왕사는 이곳 부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주민에게 한국불교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고, 불교신앙의 귀의처로서 중생성숙의 근본도량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고산(杲山)스님하면 조계종단의 중진 스님으로서 종단의 행정에 참여하여 종단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지만, 대강백(大講伯)으로서 많은 후진을 양성한 것으로 더욱 알려진 분이다. 70년대 어느 해, 성지순례와 동남아 불교국을 순방하면서 가슴이 허전하고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퇴락한 성지에서 부처님께 죄송스러움을 느껴야 하였고, 동남아 불교국의 도심에 불교수행원(修行院)이 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의 현실을 생각하게 했다. 한국불교가 우리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함께 호흡하고 맥을 같이 하며 민족정신의 근간을 이루어 왔음에도 오늘날 한국불교는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만 되뇌일뿐 오늘의 역사와 사회에 있어서의 위치가 어떠한가, 민중속에 어필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시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역사에 참여하여 중생을 키우고 역사를 빛낼 불교가 아닌가. 산중에서 도시로 뛰어들어 전법도생의 길을 개척해야할 불교가 아닌가. 이러한 스님의 고뇌가 마침내 출가자의 교육과 수행원을 건립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스님과 뜻을 같이 한 불자들이 모여 지금의 자리에 임야 6천평을 구하고 전법의 기치아래 거보(巨步)를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기와 한 장, 벽돌 한 장, 등을 한 걸음 한 걸음… 10여년이 지난 오늘의 대가람을 일구었다.

“처음에는 인구가 많은 서울 시내가 어떨까 하여 천호동 등 서울의 외곽지대를 물색하였으나, 산이 있고 도심을 끼고 있는 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침 서울과도 가깝기도 하려니와 서울 생활권인 이곳이 적합하여 터를 잡았습니다. 시내와 가깝고 산이 있고 하여 언제라도 마음의 휴식을 위하여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서산대사의 호국애민사상을 이어받고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루셨기 때문에 만법(萬法)의 왕, 진리의 법왕이라 표현한다. 그래서 석왕(釋王)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원래 석왕사라는 사찰은 함경남도 안변 설봉산에 있다. 조선조 태조의 발원으로 무학왕사(無學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승병(僧兵)을 양성하던 곳으로 호국불교의 근원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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