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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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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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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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 덕 칼럼

겨울이 다시 다가오기 전에 꼭 한 번 내설악을 다녀와야겠다고 가을 내내 벼르다가, 정작 11월15일부터는 입산이 금지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11월9일(金).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상봉동 버스터미널에서 11시 차를 탔다. 함께 다녀오자고 별러오던 친구는 하루 늦게 출발해야 할 형편이어서 나 먼저 내설악에 들어갔다가 2박 후 일요일 낮 12시경에 내설악 수렴동 계곡 산장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이틀밤을 어디서 묵느냐. 첫날은 용대리 박씨네 여관에서 묵고 다음날은 오세암(五歲庵)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첫날은 물론 백담사에서 묵었을 것이지만 요즘은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아무도 묵을 수 없게 되어있다 한다. 친구와 함께 떠날 수도 있었는데 왜 비오는데도 무릅쓰고 하루 먼저 떠났느냐 하면 오세암에서 내설악의 하루 밤을 정진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내설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 1968년 가을이었다. 그 당시 서울 근교의 산을 소풍 정도로 즐기는 실력을 가지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고 감히 내설악에 발을 들여놓은 것부터가 무모하고 즉흥적인 사건이었지만 참으로 요행으로 첫날밤 묵은 백담사에서 오세암과 봉정암의 스님들을 만나 그분들의 안내로 그 두 암자를 참배할 수가 있었으니 … 그 때 나는 불자도 되기 이전이었다.

오세암은 그때 불타고 절터만 있었는데 도윤(道允) 스님이 움막 같은 단칸 집을 짓고 법당 건립의 원을 세워 그 날 나는 모연문 맨 첫줄에 스님이 지어준 문수행(文殊行)이라는 이름으로 시주금을 기명했던 것이다. 함께 간 두 친구는 즉석에서 각각 보현행. 관음행 보살이 되었었다.

그 후 나는 내가 불자(佛子)임을 자각하고 나서도 이 이름으로 보살계도 받고 법명을 삼았으니 오세암은 내 불연(佛緣)의 첫 땅이라고 할만하다. 그로부터 거의 10년 동안 내설악 계곡은 고향마을처럼 자주 찾았고 여름방학 같은 때는 장기체류도 하게 되었었다. 봉정암은 부처님 진신사리탑으로 유명한 것은 예부터이고 오세암도 인법당이긴 했지만 훌륭히 재건되어 관음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행무상이라더니 모든 것이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을 이 골짜기에서도 배우게 되었다. 박 정권 막바지에 산간벽지의 암자나 사찰이 마구 헐려 나갈 무렵, 산기슭에 살던 너와집(板瓦)의 산사람들도 집이 헐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유는 ‘불량가옥(不良家屋)’이라는 명목으로 헐렸으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폭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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