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 법당의 샨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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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 법당의 샨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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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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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부모님에 대한 믿음, 형제에 대한 믿음, 이러한 믿음은 모두 주변에서 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직접적인 믿음들이다. 그에 대하여 친우(親友)에 대한 믿음, 사회적인 믿음이 있다. 이러한 사회적 믿음은 일을 통하여 서로 신뢰하고 공동의 이념을 지향하는데서 필요한 믿음들이다.

그러나 인간적 · 사회적 혈연적 공동이념을 떠나 종교적 믿음이 또 하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그 대상이 혈연적 이지도 않고 개인적 이해관계도 수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의 믿음도 아니다. 순수한 정성와 생명의 실상에 대한 직관에 호소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을 바르게 수행하는 참된 스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에 행복한 순간이었다.

마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창원군 성주사(聖住寺)는 서기 827(신라 홍덕왕 2년)년에 신라의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한 절이다. 이 절을 찾은 것이 작년 이맘때이다. 성주사로 가는 밤길은 적막했다. 고요와 정일 속에 안정된 마음이 마치 적멸위락(寂滅爲樂)을 생각키는 그러한 분위기였다.

스님과 함께 밤늦게 정성껏 만든 국수를 먹고 이곳의 주지스님의 순진하면서 투박한 이절 중창의 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 절에 서울에서 일군(一群)의 여태생들이 관광차 몰려 왔었다. 모두들 대웅전 법당문을 삐끗이 열어보고 부처님상을 힐끗힐끗 보면서 주춤주춤하고 있었다. 이 때 벼락같은 주지스님의 호령이 날라갔다. [부처님을 구경하라고 모셔놓은 것이 아니야, 부처님을 뵙고 싶으면 신을 벗고 참배를 해요.]라고 ······ 이 얼마나 상쾌한 말인가? 우리집 안방을 낮모르는 사람이 문을 열고 이리 저리 기웃거린다면 그것은 어떻게 될까? 주지스님은 적어도 법당의 부처님을 사생(四生)의 자부(慈父) 그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스님의 일화는 그것만이 아니다.

대웅전에 전등을 달아야 할텐데 보통 전등으로는 어버님 같은 부처님에 대한 은혜에 보답치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스님의 힘 자라는 데까지 부산에 가서 그때 싯가로 가장 고가인[샨데리야]를 달았다. 이것이 말썽이었다. 고색창연한 법당 안에 초현대식 [샨데리야]를 달았다고 그밖의 관게기관에서 철거토록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끝까지 버티어 오면서 그의 말은 간단 했다. [우리 부처님에게 가장 훌륭한 등을 달아 드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였다. 어떻게 보면 강변인 것 같지만 적어도 종교적 믿음의 세계에서는 그의 그 순수한 한말이 얼마나 폐부를 찌르는가를 의심할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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