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光明 앞에 서다(上)
상태바
佛光明 앞에 서다(上)
  • 관리자
  • 승인 2009.05.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앙수기

󰊱 파란 많은 四十 人生

그다지도 벼르고 벼르던 집을 장만하고, 이제 이웃들과 불법 믿는 형제들을 모시고 집들이 인사라도 치르고 뜻밖에 고마운 분들의 인사를 받고 나기 행복한 생각, 감사한 생각 이루 말 할 수 없는 이즈음입니다. 애기 아빠도 건강하고 사업도 순탄할 뿐만 아니라 저의 기도생활을 깊이 이해해 주고 극진히 도와주시는 것이 눈물겹게 고맙기만 합니다. 아들도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1급 기능공으로 대접받고 부모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씨가 너무나 대견합니다. 중학교에 재학 중인 두 딸도 공부도 우등이고 집안 살림은 저희들 차지인 듯 맡아서 해 나갑니다. 이웃에는 착하고 고마운 불자님이 한이 없고…… 이런 고마운 일들은 부처님께 천번 만번 감사해도 부족하고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의 눈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신 스님께 감사한 생각 무엇이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니 지나간 40여 년은 너무나 파란 많고 고통 많은 세월이었습니다. 병고, 사업 실패, 사고, 가난- 참으로 끝 모를 수렁과 험한 길을 걸어오면서 만신 상처를 입고 눈물과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이 흘러간 영화의 필름처럼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납니다.

나의 기독교 시절

저의 시가는 대대로 부처님 믿는 집안이었는데 6 ․ 25동란 중에 아들이 납북되자 시모님이 기독교를 믿으셨습니다. 6 ․ 25가 끝나고 아들이 돌아와 제가 시집갔을 때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8년을 믿으시다62세에 돌아 가셨습니다. 저는 결혼하면서 시모님을 모시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제가 자신을 돌이켜 보아도 적적적인 성격 그대로 기독교도 적극적으로 열성신자가 되었습니다. 충남 장항에 있는 장로교회인데 매일 새벽 예배가 끊이지 않았고 온갖 기도모임 행사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불같은 신앙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무거운 고난이 밀려 왔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큼지막한 잉어 한 마리를 사 왔기에 찹쌀을 넣어 고아서 잡숫게 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남편에게는 배가 아프고 창자가 뒤틀리는 듯 한 고통이 생겼습니다.

장항, 군산 등에 소문난 의사를 다 찾아도 소용없고 전주 예수병원에 가서도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만을 찾는 나였으므로 남편이 죽게 되도 『주여! 주여!』하며 기도만 하고 부흥회만 열심히 찾아 다녔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니 피골이 상접하고 얼굴은 먹장을 갈아 붙인 것처럼 꺼멓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병원에 가도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아깝게 되었다고 혀만 찼습니다.

정신없이 예수만 찾아다니던 나에게 홀연히 친정어머니를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저의 집에 오신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은 것 같다. 용왕님께 죄를 지은 것 같다.』

하시더니 저에게 과실과 채소와 밥을 지으라 하시며 당신께서는 목욕을 하시고 기도 준비를 하셨습니다.

저녁에 바다에 나가 보니 썰물에 진흙벌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공양구를 가지고 갯벌에 들어가 제물을 차려 놓고 진흙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용왕님께 사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철모르고 저지른 것이니 용서하시라는 말이고 또 저 등에 엎힌 어린 것을 보아서라도 이번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반복하여 열심히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