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누구신가? (完)
상태바
부처님은 누구신가? (完)
  • 관리자
  • 승인 2009.05.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법회강단

(9) 3천배와 무장해제

 전에는 큰스님을 뵈면 코가 땅에 닿도록 오체투지를 3번을 반복했다. 제딴에는 겸손한 척하고 열심히 3배를 했다. 그런데 정말 겸손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어색한 3배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주 지능적이어서, 어떤 말은 받아드리고, 어떤 말은 거부했다. 때로는 그 말씀은 잘된 말씀이다 하고 좋아했고 어떤 말씀은 스님이 아직 모르시는구나 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3천배 라는 것이 묘하다. 3천배 한다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3천배를 하니까 마음이 무장해제가 되었다. 우리는 외부사항이나 사람에 대하여 마음속에서 부단히 경계를 하게 된다. [ 저 사람이 나를 해롭게 하지 않을까. 나한테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도 모르게 살피고 있다. 이것을 일종의 무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3천배를 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무장해제가 됐다.

 큰스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긍정적으로 들린다. 마음이 비어있는 그 밑바닥에 네가 부처라는 말이 들어와 꽃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스님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스님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감고 싸고 있던 교만, 경계, 계산의 갑옷을 벗어던지고, 무장해제를 한데서 우러나게 된다.

 (10) 숨김없는  목소리

 렇게 스님을 존경하게 되니 비로소 가르침을 받아 들였으나 한편에 또 다른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그것은 [ 내가 부처일 수 없다. 닦아야 부처이지 내가 이대로 부처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 나는 죄인이다]라고 어떤 종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자기를 죄인이라고 불러야 더 합당하지 내가 부처님이라고는 도저히 남 앞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렷한 이성을 가지고서 내가 부처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 가벼운 고백이었다. 내가 과거에 나쁜짓한 것을 환히 기억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내가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스님의 [네가 부처님]이라는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 오니까 그 말을 받아 드릴 수 없는 요소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전에 [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 할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부끄러운 면들이 [ 내가 부처다]라고 말 할 때는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변증법적인 역학관계가 있는 것 같다. 스님에 대한 존경이 철두철미 해질수록 내 마음속의 양심이 [나는 부처가 아니다]는 생각이 머리를 든다. 그리고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것이 투철하게 느껴지니까 스님이 말씀하신 [ 네가 부처]라는 말이 정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일어난다.그것이 정말이면 얼마나 좋을까. 또 그것은 [ 정말이어야 된다] 이런 욕구가 일어나면서 스님에 대한 존경, 필요성, 선지식에 대한 요청이 더욱 간절해졌다. 선지식에  대한 요청이 간절해질수록 나는 정직해져서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나의 어둠이 드러나고 그 드러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잠이 안오고, 입맛이 없고, 그것에 대하여 몰두하게 되었다.

 (11) 정진과 공리주의

 러니까 정진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이렇게 하면 무엇이 될 수 있나, 다시 말하면 이렇게 참선을 하면 견성성불할 수 있다. 이런 것을 나는 정진이 아니라고 본다. 정진의 흉내이다. 왜냐하면 사고방식이 이기적이고, 공리적이기 때문이다. 공리적이라 하는 것은 십원 냈으니까 십원어치 물건을 달라. 내가 천원 헌공금 올렸으니까 천원어치 복을 주시오. 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내가 3년간 참선을 했으니까 3년값 내 놓으라 하는 식이다. 십년을 참선 했는데 안깨달았으니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본전이나 찾아야 하겠다 하는 이기주의 상업주의 심리이다. 상업주의 심리가 남아 있는 한 종교적 마음은 숨을 못쉬고 일어나지 못하고 자라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정진은 자기도 모르게 정진하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는 공식을 가지고 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목적이라는 이원론이다. 이런 수단을 쓰면 저런 목적이 성취된다고 하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발심은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등 모든 성자의 경우를 보아도 공리적인 것은 없다. 자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수행의 확증이다. 설사 처음에는 기도하면 기도성취가 된다는 공리적인 심리가 작용하여 출발 했다가도 지극하게 기도하면 마침내는 공리적인 것에서 탈피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마지막에 가서야 탈피할 것을 처음부터 확연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