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의 과일을 거두려면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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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의 과일을 거두려면 믿음,
  • 관리자
  • 승인 2009.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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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깨닮의 나무(覺樹)를 가꾸는 밑거름

  1972년 겨울, 충북 괴산 부근의 어느 조그만 암자에서 지낼 때였다. 마침 그날은 대입예비교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새벽 일찍 일어나 예불을 드리려고 밖으로 나오니 주위가 온통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갖춰 입은 후, 칠흑같은 어둠속에 하얗게 내린 은백색의 눈위를 걸으며 법당으로 향했다. 법당문을 열고 법당안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그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진한 향내음이 법당안으로부터 확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멈칫하면서 "혹 관세음보살이 오신게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왜냐하면 그 법당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나 또한 관음기도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곧바로 법당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얼마간 생각을 가다듬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고,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도 전혀 없었다. 그 날 나는 틀림없이 관세음보살님께서 오셨다 가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도량석. 종성. 예불을 드렸다. 그리고 예비고사를 보러갔다. 그 날 하루종일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결국 예비고사에 합격했고, 그 이듬해 1월 해군사관학교에도 합격하여 마침내 해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1972년은 함츠로 나에게 있어서 좋은 한 해 였다. 8월에는 대입자격검정고시, 12월에 예비고사, 그리고 그 이듬해 1월의 해사합격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모든 시험에 합격했으니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 내지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이었으리라.

  이렇게 해서 해군과 인연을 맺었고, 사관생도가 되기 위한 힘든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사관생도라고 하는 것이 그저 옷만 입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훈련과 반복되는 철저한 교육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므로 얼마만큼 노력해야 하는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나에게 있어서 그 어려운 순간들이 참기 힘들었지만 제불보살님을 향한 끝없는 구도의 마음이 마침내 오늘과 같은 영광스런 결실을 맺게 해주셨다. 순간순간 힘들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그 어려운 과정을 견디어 냈던 것이다.

  믿는다고 하는 것, 무엇엔가 의지한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일 지 모른다. 이 말처럼 편안하고 포근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속에서 고이 잠들 때, 그 모습은 한없이 평화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러면 무엇이 엄마품에서 그렇게 편히 잠들게 하는가? 열달동안 들어 온 엄마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인가. 아니면 열달동안 소중히 보호해 주신 엄마의 내음인가? 무엇이든 좋다. 다만 믿을 수 있고, 의지할 곳이 있는 엄마의 품안이 그렇게 했으리라는 점이다. 엄마의 품안은 거짓이 없고, 사기를 당할 염려가 없는 절대로 안전한 곳이라고 짐짓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믿는다는 것, 즉 믿음을 한자어로 '信'이라고 한다. 신(信)은 '人(사람) +言(말씀)'으로 되어 있다.

  1979년 여름이었다. 그 해는 해사를 졸업, 장교로 임관된 후 법사가 되기 위해 동국대에 편입한 때이다. 방학을 맞아 해인사 지족암에서 지내던 때였다.  바로 옆으로 약 15분 쯤 산비탈을 오르면 백견암이 있고, 거기에는 지금도 내내 두문불출하고 계시지만 성철큰스님께서 계신다고 했다. 그 분을 뵐려면 삼천배를 해야 한다기에 온종일 절을 해서 3,000배를 채우고, 그 다음날 아침 절룩거리는 몸으로 평소 15분 정도면 갈 곳을 근 1시간 정도나 걸려서 백련암에 올랐다. 큰 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니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어떤 여자신도가 열심히 절에 다니니까 남편되는 분이 시험하기 위해 부인에게 물었다는 것이다. "만약 부인이 계속 절에 나가면 내가 죽게 되고, 나가지 않으면 내가 살게 될 경우 그래도 당신이 절에 다닐 것인가" 하고. "이럴 경우 자넨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하시는 것이다. 뭐라고 대답을 드릴까 망설이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부인의 입장이 난처하긴 했지만 "당신이 죽고 사는 것은 당신의 명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남편이 두번째 질문을 했다면서 그 질문을 또 나에게 하셨다. "당신이 그렇게 믿어서 만약 내가 지옥에라도 떨어진다면 당신 어찌하겠오"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또 말씀하셨는데, "스님은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오. 옳은 길만 가르칠 분이지 결코 그른 길을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때 남편되는 사람은 집사람이 기복적인 신앙에 의해 아무것도 모르고 남이 절에 가니까 그저 따라 다니는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자 본인도 열심히 절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이로운 것은 취하고 해로운 것은 버리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불교를 믿으면 안되고, 오로지 굳은 신념과 바른 신심으로 불교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가진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심을 다졌고 또한, 그 날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되돌아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그러한 날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믿음에 대한 몇가지 실례로서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언급했다. 자칫 정적(情的)인 면으로만 설명한 것이 아닐까 여길지 모르겠는데, 사실 믿음이라고 하는것은 지성(知性)보다는 감성(減性)이 앞서고 논리보다는 논리를 넘어선 그 어떤 신비성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의 정의를 논할 때도 종교란 지(知)적인 면, 정(情)적인 면, 의(意)적인 면의 3가지 방향에서 이를 규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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