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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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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塋宙) 이남덕/이화여대 명예교수

그녀가 출국하기 전 몇 해 동안을 우리들(10여명)은 주머니돈을 털어가며 계간(季刊)으로 신상(新像)이란 동인지를 내던 사이라 여기 안정된 직장을 두고 떠나기를 무척 서운해 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의 전공은 국문학, 그중에서 한국시가(詩歌)에 나타난 운률(韻律)문제가 그녀의 석사논문의 과제였었다. 그러나 교수로서가 아니라 학생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그녀에게는 국문학의 어떤 제목을 가지고 외국에서 수학(修學)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막막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언어의 음악성(音樂性)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녀로서 문학적 측면에서 과제를 잡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대학당국에 제출한 제목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테마부터 난관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네 번이나‘부적격’으로 딱지를 맞던 날밤 기진맥진해서 밤새워 기도를 올렸다 한다. 새벽이 되면 새들이 우짖는데 날이 새기 전에 응답을 주소서하고 간절한 마음 이었다 한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바로‘훈민정음(訓民正音)’ 네 글자였다. 비몽사몽간에 눈앞에 환하게 두루마리가 떠오르더니 그것이 펼쳐지면서 그 네 글자가 뚜렷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학적 측면에서 우리말 그 자체를 연구하게 된 것이니 본인으로서도 이것은 180도의 대전환이 아닐 수 없다. 가히 전공을 바꾼 셈이다. 흔히‘국어국문학’이라고 한데 싸잡아서 말하지만 다루는 자료가 우리의 언어표현이란 점만 공통이지, 다루는 방법이 전혀 같지 않은, 다른 분야의 학문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녀가 이 새로운 과제(계시)앞에서 망연자실했을 것도 또한 짐작이 간다. 바로 그 때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73년도 여름에 보스톤에서 참으로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바팔로에 있을 줄 알았던 그녀가 바로 그 전날 지친 머리를 쉴 겸 가족과 함께 보스톤에 여행을 나왔다가 뜻밖에 만나게 되니 그 반가움도 갑절로 컸다. 보스톤에서 바팔로로 따라가서 덕분에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을 내외분 안내로 잘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이아가라 관광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구경시켜 준 곳이 바팔로 대학의 음성학 실험실이다. 그녀가 왜 훈민정음에 대한 질문을 내게 그렇게 퍼부었는지 이번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영문도 모르고 그가 전공을 음성학(음성학)으로만 돌렸다는 것만 알았었다.

음운론은 각 언어마다 음운체계라는 것이 있어서 모음이나 자음체계에 대한 이론을 다루는 분야인 때문에 이론만으로 해나갈 수 있지만 음성학은 소리가 나는 발음기관이나 청각영상에 대한 기계적 실험적 연구인지라 그 당시 만해도 국내대학에 아무런 실험기구도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이 방면은 실로 유명무실 아주 한데 같은 느낌이었다. 실험기구가 완비한 외국에 나가서 그녀는 본래 언어의 음악성에 귀가 밝았던 자질 때문에 이 방면에서 막혔던 봇물이 터지는 것과 같은 힘찬 발전을 이룩했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귀국 후 그녀에게 훈민정음의 국내업적들을 소개하는 일을 도와주려고 그 무렵 가장 큰 업적이었던 이정호(李正浩)선생님의 「훈민정음의 구조원리」를 소개했었다. 두 분의 학문적 교섭의 다리를 놓아 드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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