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천이 복개되기 전의 일이다. 아니 복개할 엄두도 내기 전, 아득한 해방 직후 이야기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삼선벌 일대는 한가한 주택지로서, 한낮에 두세명이나 될까 한 승객을 태우고 전차나 땡땡거리며 심심파적으로 오갈 뿐, 해방직후의 그 날마다 벽보요 암살이요 하던 문안의 소요가 미쳐 동소문을 넘어오지 못하고 있을 때 였다. 그러니까 이박사가 환국하여 돈암장에 들기도 전 이야기다.
돈암교 파출소 뒤, 더러 목재상이 자리하고 띄엄띄엄 시장을 오가는 사람이나 오가던 개천가 길목에 마구깐이 하나 있었다. 어느 때부터 서울 시내에 마차말의 모습이 사라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눈앞에 최후까지 남았던 마구깐은 바로 이것이다. 하기야 옛날 전차종점에서 미아리 고개를 쳐다보며 올라가다, 요즘 점장이집이 부쩍 는 거리보다 하나 앞서는 왼쪽 골목을 들여다보면, 한 오십미터 안쪽으로 오래 된 해장국집이 마주 보인다. 그 집에 머리를 빡빡 깎은 주인노인 말을 들으면, 한 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넘어 동대문 종로쪽으로 실어내는 나뭇꾼 마차꾼들이 새벽같이 넘어 닥쳐 이 집 해장국이 그렇게 이름이 나었다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유해가 지금 우이동 묘소로 운구되는 사진에 이 삼선벌을 지나는 장면이 있다. 지금 혜화동 고갯마루, 그러니까 그때 동소문에서 돈암동 일대를 내다보며 논밭이 질펀하고 띄엄띄엄 외딴집이 묻혀 있는 그 들판을 미아리 고개를 향하여 논둑길이 휘어돌아 나가고 있었으니 마차길은 돈암교에서 신설동쪽으로 빠져나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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