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불교미술] 중국편 18.중국의 석굴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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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불교미술] 중국편 18.중국의 석굴사원
  • 이기선
  • 승인 2008.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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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편 18.중국의 석굴사원 - 그 문화사적(文化史的) 의의 -

 중국은 세계 4대 문명발상지의 하나인 황하문명(黃河文明)을 비롯하여 오랜 세월동안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인류 문화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가운데 돈황석굴을 비롯한 숱한 석굴사원 또한 값진 문화유산(文化遺産)의 하나이다. 주지하다시피 석굴사원은 「그 자체가 장려(壯麗)한 건축이고 조각이며 회화이기 」때문에 불교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보고(寶庫)이다. 그것은 또한 중국에 있어서 숱한 불교 사적(史蹟)이 전란이나 화재 등으로 인하여 망실(亡失)된 데 비하여 석굴사원은 그 지리적 분포와 풍토적 영향에 의해 비교적 손실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석굴사원이 새롭게 역사의 조명(조明)을 받게 된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었다. 돈황의 천불동(千佛洞)이 유럽인의 손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이래로 다투어 「보물찾기」같은 경쟁이 때마침 식민지 찾기에 나선 열강(列强)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석굴사원은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새롭게 등장하는 기쁨을 누리는 한편 인위적인 약탈이 자행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1900년 왕원록(王원록)이란 도사(道師)가 돈황의 석굴을 발견하여 관리해 오면서 많은 불경과 조각품들을 빼내어 이 지방 관리들에게 뇌물로 받치고 있었는데, 당시 돈황의 자료를 모으던 프랑스의 뽈 뻴리오(Paul Pelliot)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를 설득하여 마침내 석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굴을 열자 사방 2.5m 정도의 조그만 방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무려 1만 5천개가 넘는 두루마리였다. 감격 속에서도 이 유뮬들을 수습한 뻴리오는 다시 여러 차례 교섭 끝에 상당수의 중국사경(中國寫經)을 제외한 모든 유물들을 본국인 프랑스로 가져 가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돈황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때 뻴리오가 구입한 유물들은 사경(寫經)만 해도 4~5천개에 달하였다 하며, 그 후 천불동 석굴을 발견하여 중국, 몽고, 위굴 등지의 불경을 더 보태게 되었으니, 오늘날 프랑스 소장의 이 돈황 유물은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밖의 나라를 통틀어도 그 내용과 수량에 있어서 비교될 것이 없을 만큼 우수한 것임이 세계적으로 공인되고 있다. 이 뻴리오 발굴품 중에는 8~10세기경 목판인쇄의 잔편(殘片)이 많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서양의 이른바 구텐베르크 인쇄법보다 5~7세기가 앞서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이 수사본(手寫本)들은 중국학(中國學) 연구가들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즉 대중시(大衆詩) 불경주해, 소작계약(小作契約) 등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당대(唐代) 중국사회에 대한 새로운 문헌들을 제공한 것이다. 이 숱한 자료가 쏟아진 굴을 장경동(藏經洞)이라 하며, 이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도 바로 이 때의 발굴품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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