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보고 땅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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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보고 땅 보고
  • 관리자
  • 승인 2008.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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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시심(禪心詩心)

   지난 호에서도 말했듯이 깨달음이란 세속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는 작업이기는 하나 일단 깨달아 성인이 되면 다시 범부의 자리로 되돌아옴이 참다운 보살도의 실행이라 하였다. 깨달은 내가 범부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없이 모든 집착에서 여읜 것이 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산속에 있어서도 산 아래의 사정을 알 수 있어야 하고 시정의 번화한 거리에 있어도 산속보다 더 정적한 마음이라야 수도인의 몸가짐이 될 것이다. 이들이 앉아서 천리 보고 서서 만리 본다 하였던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현재의 상황을 떨어 버리고 성범(聖凡) 진속(眞俗)의 개념을 넘어 본체 법의 실상을 여여히 관찰 · 명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시인이 시를 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표상된 물체의 겉모습만을 살펴서는 그 물체의 실상을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실상 뒤에 숨겨져 있는 본체의 실상을 말할 때 시적 상상이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시와 선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요건이며, 선사의 어록이 바로 시어로 연결되는 소이인 것이다.

   조선조 초기 함허(涵虛) 득통 화상(得通和尙)은 송기밥(소나무 속껍질을 섞어 만든 밥)을 보고 짓는 시에서 진 · 속이나 성 · 범의 어울림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구름 잡고 돌에 걸터앉아

     청산에 늙어 가며,

     모든 나무 다 잎 져도

     홀로 추위 참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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