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孔笛
상태바
無孔笛
  • 관리자
  • 승인 2008.01.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門前 시내물의 說法

 이 글은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월례법회의 설법 중에서 요점 일부를 초한 것이다. 설법전문을 싣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文責記者) 

 무엇이 열반 대도인가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번 내리치고)

 설법은 무법설법(無法說法)이 시명설법(是名說法)이라 법을 가히 설할 수 없는 것이 설법이다.

 그리고 법문(法門)은 입을 가지고 하는 것도 있고 문자를 가지고 하는 것도 있고 말과 문자를 떠나서 하는 법문이 있는데 말과 문자를 떠나서 한다는 것은 말도 아니고 문자도 아니고 눈만 끔쩍해도 거기에 다 법문이 있다. 그것이 진리법문인 것이다.

 눈 끔쩍하는 것도 오히려 일이 많아서 목격이도존(目擊而道存)이라 눈을 대지르는데 거기에 도(道)가 있다 하는 것이다.

 또 종사(宗師)가 법상(法床)에 오르기 전에 법문이 다 되었고 또 청중이 좌(座)에 앉기 전에 법문이 다 된 줄 알아야 된다.

 조사의 깊은 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문밖에 한 시냇물이다.

 (欲識祖師旨 門前一溪水)

 

 날이 비추니 광명이 나고

 바람이 부니 물에

 파랑이 일어 남이로다.

 (日照光明色 風來波浪起)

 이것이 오늘 법문인데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종사가 법상(法床)에 오르기 전에 법문이 다 되고 청중이 좌에 앉기 전에 법문이 다 된 그뜻을 잘 알아야 된다.

 조사스님한테

 「보살(菩薩)이 어떻게 행(行)해야 되겠습니까?」이렇게 물으니 조사스님 말씀이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대자대비(大慈大悲)가 구족(具足)한 그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이랬다.

 보살은 육바라밀(六波羅密) 법문을 깨치고 성문(聲聞)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四諸法門)을 듣고 깨치고 연각(緣覺)은 십이인연법문(十二因緣法門)을 듣고 깨치는데 요새 보통 보살이라고 하면 대자대비한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菩)」자는 요달(了達)할 요(了)자의 뜻인데 무엇을 요달해서 그 근본을 아는 것을 「보(菩)」라 하고, 또 「살(薩)」자는 본다는 뜻으로서 요견(了見)하는 것, 보는 것이 곧 보살의 뜻이다. 그래서, 

 「보살의 행할 바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니 조사스님 말씀이

 「비현성행(非賢聖行)이요 비범부행(非凡父行)이다」 보살의 행이 어진 성인의 행이 아니요 또 범부가 행하는 행도 아니다.

 「이것이 보살의 행이며 만약 보살의 행을 배울 때에 세상의 법(法)을 취하지 아니하고 또 세상의 법을 버리지 아니한다(不()世法).」

 「만약 능히 심식(心識)을 즉(卽)하는 것이 도(道)에 들어 가는 자다. 범부(凡父)와 성문(聲聞)이 이 도리를 가히 측량할 수가 없다.」

 일체사(一切事)에 처(處)하며 일체색(一切色)에 처하며 또 일체악업(一切惡業)에 처해서 보살이 이것을 써서(用)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다.

 또 다 열반을 짓는 것이며 다 이것이 대도(大道)다.

 이 일체처에 주해서 처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 곧 법처(法處)며 곧 이것이 도처(道處)다.」

 보살이 행할 법(法)의 곳이며 도(道)를 닦는 곳이다. 또

 「보살이 일체처를 관(觀)하는 것이 법처며 보살이 일체처를 버리지 아니하고 일체처를 취하지 아니하고 보살이 또한 일체처를 간택(揀擇)하지 아니하고 곧 생사에 즉해서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고 곧 미혹(迷惑)에 즉(卽)해서 불심(佛心)을 짓는 것이다」이랬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