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일본불교와 종립학교(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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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일본불교와 종립학교(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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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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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불교

     [4] 법륭사(法隆寺)

   일행은 법륭사를 찾았다. 이 절은 1375년 전 일본 문화의 개척자라 할 성덕(聖德)태자의 발원으로 건립된 만큼 4만 4천 평의 넓은 경내에 50여 동의 대소 당탑이 장관이었다. 모두가 이 나라 중요 문화재이고 일본 역사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니 가히 박물관이라 할만도 하다. 우리는 금당(金堂), 오중탑(五重塔), 대강당을 두루 살폈다. 그 중에 금당에는 사방 12면의 벽에 유명한 대벽화가 있었으나 1947년의 화재로 아깝게도 원화는 볼 수 없었다. 그 그림이 저 유명한 고구려 담징(曇徵)의 작품이다. 30여 년 늦게 찾아간 것이 한스러웠다.

   다음에 찾은 곳이 연력사(延曆寺)이다. 일본 천태종 대본산이다. 서기 785년 최증(最澄) 대사가 개산하였으며 역대로 고승이 많이 배출되어 사제가 대단하였다. 역사적으로 비예산 연력사는 불교 각종 조사가 된 많은 고승이 여기서 개오하였다. 법연(法然), 친란(親鸞), 영서(榮西), 도원(道元), 일련(日蓮), 일변(一遍) 등도 예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절의 가장 큰 수난은 오다 노부가나(織田信長)의 화공(火攻)이었는데 그때 타버린 것을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20년에 걸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근본중당(根本中堂) 동탑 대강당을 세밀히 살필 수 있었다. 그 중 특기할 것의 하나는 강당의 존상 배열이다. 중앙 본전에 대일여래를 봉안하였고 그 좌우에 9인의 타종조사를 배열한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불교는 조사 불교라는 일면을 한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또 하나 기록할 것은 최증 대사가 처음 공부하였다는 중당에 있는 약사여래 앞에 있는 이른바 불멸의 법등이다. 여기에는 3개의 등불이 밝혀 있었는데 이 등불은 천 이백여 년 동안 꺼진 적이 없이 이어 내려온다고 한다. 일본인의 기질과 신앙심을 여기서 다시 본다.

     [5] 용곡대학(龍谷大學)

   1월 21일 우리는 교도(京都) 시내를 돌고 예정대로 용곡대학과 서본원사(西本願寺)를 찾았다. 용곡대학은 1636년 서본원사의 학료(學寮)로 창설한 것이 그 시작이다. 그 뒤 계속 학림제도를 강화하여 시설을 확충하고 내학(內學), 국학(國學), 한학을 교수하였으며 1872년에 처음 양학(洋學)을 개강하고 1875년에 정식으로 유럽식 학교제도를 채택하였다. 계속 학제를 다듬어 각 현에 소교교(小敎校), 주요 지방에 중교교, 그리고 학림을 대교교라 하였고 따로 교원양성을 목적으로 교사교(敎師校)도 두었다. 용곡대학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22년 이다. 2차대전 이후에는 문호를 개방하여 많은 인재를 사회 각계에 보내기도 하고 오늘날의 문과계 종립대학으로 명문 사학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 대학의 진면목은 역시 불교학과에 있다. 3백 50년의 역사를 가진 진종학(眞宗學)을 위사하여 성전학(聖典學), 교리사(敎理史), 교의학(敎義學), 전도학(傳道학) 등 전공분야에 많은 장서와 연구실을 갖추었다. 도서관에는 불교 서적만도 30만권이라 하니 이것만으로도 불교 최고 학부의 면목을 갖추었다 하겠다.

   용곡대학은 대곡(大谷)대학과 함께 정토진종(淨土眞宗)에서 설립한 학교인데 진종 각파를 합친 교세는 일본 제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탁세에서 정토를 지향하는 진종의 특성과 함께 교육을 중시한 저들의 역사에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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