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일연의 자취(1) 대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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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일연의 자취(1) 대견사
  • 계미향
  • 승인 2023.03.2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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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비슬산에
머물다
비슬산 대견봉 아래 대견사. 신라시대 보당암으로 창건됐다. 보당(寶幢)은 ‘불보살을 장엄하는 깃발’이라는 뜻이다.

비슬산은 언제나 ‘핫’하다. 산세가 워낙 특이하고 유서 깊은 사찰과 문화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보니 일 년 내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해발 1,000m 대견봉 정상에서 펼쳐지는 4월의 참꽃 군락은 몽환적이다. 여름에는 풍부한 물줄기와 폭포가 수시로 이내(안개)를 피워올리고, 얼핏 지나는 바람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기묘한 바위와 암벽, 가파르게 쏟아진 너덜(암괴류)은 태고의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봄꽃보다 화려한 비슬산의 단풍 속에는 머루와 다래, 으름이 보석처럼 달려 있고,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다람쥐의 눈망울이 영특하다. 코끝 쨍한 겨울의 냉기 속에 수정 같은 상고대가 화려하게 피어나고, 골짜기마다 쭉쭉 뻗은 소나무와 신우대는 더욱 푸르르다.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1206~1289) 스님이 71년간의 승려 생활 중 절반인 37년여를 비슬산에서 보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보당암에서의 10년

고려시대 문신인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에 따르면, 일연 스님은 1206년 6월 경주 장산(현 경남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見明), 호는 목암(睦庵), 모친은 이씨다. 9세에 광주 무등산 무량사(無量寺)로 가 5년간 수학했고,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도의선사 탑비에 참배한 후, 대웅(大雄) 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타고난 총기를 바탕으로 부지런히 공부했기에 수행과 학덕이 구산사선(九山四選)의 으뜸으로 추거됐고, 22세에 승과의 상상과(上上科)에 장원 급제했다. 그 후 일연 스님은 초임지인 포산(包山, 비슬산) 대견봉 보당암(寶幢庵)에서 약 10년간 수행 정진했다. 하늘과 맞닿은 대견봉 정상 남쪽에 위치한 보당암은 비슬산의 상징이었다. ‘불보살을 장엄하는 깃발’이라는 뜻의 보당(寶幢)은 불연 깊은 비슬산 전체를 표시하는 깃발인 것이다. 태장계만다라에서 보당여래(Ratnaketu)는 여의보주(如意寶珠)의 기인(旗印)을 가진 존재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붓다를 말한다. 그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여원인을 결(結)하고 연화좌에 앉아 있다. 이 보당여래의 공능은 불도수행의 근본인 보리심을 기인으로 하여 수행을 방해하는 나쁜 무리를 쫓아내는 것인데, 바로 비슬산에서 보당암과 3층 석탑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슬산의 풍부한 생태계는 온 생명을 살리고, 계절마다 연출되는 신령스러운 비슬산의 풍경은 수행자를 더욱 수행자답게 만드나 보다.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 더구나 상상과에 급제한 일연 스님을, 비슬산의 무엇이 그토록 오래 붙잡았을까? 22세에 시작된 일연 스님의 비슬산 생활은 청년기를 지나 장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31년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했다. 왕실은 강화도로 옮겨졌고, 1235년에는 동경(경주)까지 유린당했다. 일연 스님은 10년간의 보당암 생활을 정리했다. 수행자로서는 보당암이 최적의 수행지였겠지만,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가와 민초들을 위해서는 산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시대적 책무를 담당하고자 한 게 이유였을 것이다. 

일연 스님은 새로운 곳에서 감응을 얻고자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인 ‘아라파차나(阿羅婆遮那)’를 외웠고, 1236년에 산 아래쪽의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으로 옮겼다. 그해에 삼중대사가 됐고 남해로 가기까지 12년을 더 머물렀다. 

비슬산의 신비롭고 특이한 산세, 정상에 위치한 보당암은 호연지기를 기르기에 맞춤이었다. 울창한 숲과 조화로운 생태계가 주는 평화, 너덜과 이내의 신비감, 봄마다 벌어지는 참꽃 군락의 대향연! 그 속에서 일연 스님의 생활은 무척 치열했을 것이다. 그가 전도양양한 학승이었음에도, 중앙권력과 관련해 22년간이나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은, 비슬산을 터전 삼아 주로 수행과 학문에만 힘썼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국가 안위가 위태로운 격변기였기에 일연 스님은 수행은 물론,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삼국유사』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과 연구로 짐작된다.

일연 스님은 정사인 『삼국사기』에 우리 민족의 시원인 단군이나 가락국기 등에 대한 서술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무엇보다도 불교 전래와 원효·의상 등의 걸출한 스님과 명찰의 인연담 등 불교문화에 대해 서술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서나 경전, 고승전, 지방지 등을 찾아보았고, 그것들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기본 자료가 됐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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