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팔공산의 신화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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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팔공산] 팔공산의 신화와 전설
  • 이지범 
  • 승인 2022.11.3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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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고을의
이야기를 품은 뫼
동화사 비로암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팔공산 모습

그간 우리는 1902년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만든 〈산맥도〉에 의해 잘못 배웠다. 여암 신경준은 1770년에 만든 『산경표(山經表)』에서 우리나라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분류했다. 한반도의 조종산(祖宗山, 나라의 중심 산) 백두산에서 시작돼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나눴다. 동해와 서해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각각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을 정맥이라 했다. 

이 기록에 포함되지 않는 큰 산이 영남의 팔공산이다. 한반도의 산줄기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산으로 큰 산이었기에 모두 ‘공산(公山)’으로 불렀을지 모른다. 신라 때부터 중악·부악(父岳)·공산·악산 등으로 쓰고 부른 팔공산의 이름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산은 팔공산(八公山)이라고도 일컫는다”고 처음 기록됐다.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다시 기록돼 그 명칭이 현재까지 쓰인다.

산 이름과 같이 붙이는 영남(嶺南)이란 지명은 고갯마루 남쪽이라는 데에서 유래됐다. 경상도 지방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영남은 158년(아달라왕 5) 신라시대에 개설된 죽령(竹嶺)과 1414년 조선 태종이 관도로 개설한 조령(鳥嶺, 일명 문경새재) 두 고개의 남쪽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영남이란 지명도 고려 때인 995년(성종 14)에 확정된 명칭이다. 1106년(예종 1)에 경주·금주(김해)와 상주와 진주·합주(마산)의 앞 글자를 따와 경상진주도라고 했다가 1186년(명종 16)에 경상주도, 1314년(충숙왕 1)부터 경상도라 불렀다.  

이곳의 중심인 팔공산은 7세기 신라 진평왕 때 지정된, 다섯 곳의 산을 신격화하고 호국 사상으로 발전한 오악 사상에서 중앙의 부악으로 표기된 으뜸 산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두 날개를 쫙 편 봉황새의 모양이라 했다. 지금이야 위성지도와 드론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지리 정보지만, 그 옛날 팔공산의 산세를 봉황으로 형상화해 낸 것은 경이롭고 심미적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의 산세는 봉황이 양 날개를 쭉 펼치고 있는 것처럼 동서로 나뉘어 솟아 있다. 

봉황을 상상할 수 있는 곳으로 세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신림봉은 봉황의 자궁부라 지칭하고, 세 개 바위는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신림봉 제1바위는 코끼리 모습과 같고, 제2바위는 일명 고인돌 바위로 부른다. 제3바위는 달마대사를 닮았으며 1989년 제작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일설에는 봉황이 날개를 펼 때, 동화사와 부인사 쪽이 몸통이다. 지금도 동화사 봉서루 아래 바위에 돌로 된 봉황알 3개가 놓여 있다. 은해사와 거조암 쪽이 왼쪽 날개, 칠곡 송림사 쪽이 오른쪽 날개, 치산의 수도사 쪽이 꼬리의 형상으로 달구벌을 향하는 산 모습이라 알려진다. 이처럼 영남의 명산 팔공산에 관한 이야기는 천년 동안 켜켜이 쌓인 고대인들의 앨범 속에 있는 신화와 전설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곁을 지나가는 현재일지도 모른다. 

 

신라의 전설을 품은 팔공산

1931년 3월 건립된 「동화사 사적비」에 중악으로 표기한 팔공산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이렇게 나온다. “심지왕사가 영심대사로부터 전해 받은 제8, 제9간자(簡子, 미륵보살 수계를 의미하는 징표)를 동사(桐寺)에 봉안했다. 고려 예종이 명하여 궁중으로 옮겨서 친견할 때, 제9간자가 분실돼 그 대용품을 만들어 보낼 때, 제8간자만이 상서로운 기운을 발산하였기에 제8간자의 ‘팔(八)’자를 공산 지명 앞에 붙여 팔공산이라 했다.”

여덟 번째 간자 설은 18세기 이중환의 『택리지』에 “공산에 위치한 동화사는 493년 신라 소지왕 때 극달화상이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832년 흥덕왕 때 진표율사의 제자이며 헌덕왕자인 심지왕사가 간자를 받아 중창할 때, 간자 8과 9 두 개를 던져 그 떨어진 곳에 불당을 이룩하니 지금의 첨당(籤堂) 뒤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인데, 때마침 겨울인데도 오동나무 꽃이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창건 설화로 기록됐다. 

또 여덟 명의 성인이 득도한 산이라 하여 팔공산이라 불렀다. 깨달음을 이룬 설로 원효대사의 제자 여덟 명이 경남 양산 천성산에서 공산으로 들어와 세 명은 삼성암에서, 다섯 명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는 전설이다. 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오도암 옆의 청운대에는 대사가 머물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서당굴(원효굴)이 남아 있듯이, 7세기 제자들이 깨침을 이룬 곳은 암자라기보다 바위굴일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말의 곰뫼·곰산·꿩산 등으로, 신라시대부터 중악·부악·악산·공산·동수산(桐藪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 팔공산은 『삼국사기』에 “611년 진평왕 때 17세의 화랑 김유신이 중악석굴에서 낭도들과 수련하였다”고 기록됐다. 그곳은 ‘돌구멍절’ 또는 ‘까치절’로 유명한 중암암(中巖庵)으로 추정된다. 이 암자 곁에는 팔공산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 만년송이 자리하고, 화랑 김유신이 수도하며 마셨다는 장군수 샘과 화랑들의 수련장인 고봉암 터 등의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팔공산의 전설은 7세기 신라가 당나라에 파견했던 견당사절단(遣唐使節團)이 걸었던 길을 따라 신라 서라벌에서 옮겨 왔다. 부인사 연대기에는 신라 선덕여왕의 원당으로 여왕의 꿈이 서려 있다. 절에서는 선덕여왕의 영정을 걸고, 해마다 음력 3월 15일에 ‘선덕여왕 숭모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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