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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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
  • 관리자
  • 승인 2007.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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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나의 다짐

오늘은 설날이다. 이국땅에서 맞는 명절이 몹시도 허전하고 그 옛날 고향집에서 치루던 제삿날 정경이 새삼 생각나는 날이다.

내 아버님은 유교적 인생관에 철저하신 분이셨다. 설날이나 추석날 아침엔 가족 모두 몸을 씻고 새옷을 갈아입게 하시고 제사 행사를 치루시는데 화려하게 차려진 젯상 앞에 나란히 선 오빠들이나 조카들은 기침도 크게 못 하시는 아버지 옆에서 자연히 엄숙한 자세였다.

어머님과 올케들은 며칠 전부터 제사 준비에 분주하셨다. 일을 도와주기 위해 오신 동네 아주머니들은 기왓장을 곱게 부숴 가루로 만들어 제기(祭器)를 반짝반짝 윤기 나게 닦고 나면 온 종일 맷돌질을 하고 있었고, 어머님과 올케들은 떡이랑 나물들을 정성들어 만드시고 산적이나 지짐일은 시누이인 내가 거들었다. 큰 쇠솥뚜껑을 뒤집어서 화롯불에 얹어놓고 따뜻한 찬방(饌房)에 앉아 부침질을 하는 일이 나는 즐거웠다. 내가 출가한 이후 언젠가 설날 바로 전에 돌연히 양주 한 병과 케이크 한상자를 사들고 친정집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날은 눈이 많이 쌓여 발목이 빠질 정도였다. 큰절을 올리고 나니 아버님은 당신을 따르라 하시며 내가 갖고간 선물을 들고 뒷산의 묘지로 향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모처럼 한복에 버선을 신고 갔었는데 그 얕은 고무신으로는 도저히 눈덮인 산길을 오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님의 표정에서 나는 감히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따라나서야 했다. 아버님은 귀한 음식을 대하시면 언제나 조상님 묘앞에 먼저 올리고 싶어하는 분이셨다.

묘비 앞에 놓여진 돌상 위에 수북히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내시고 케이크 상자를 여신 다음 정성스럽게 양주 한 잔을 잔에 따라 놓으시고 잔디밭 백설 위에 엎드려 재배를 하셨다. 나도 숙연해져서 아버님 옆에서 엎드려 절을 했다. 그리고는 몇 해가 지난 후 나는 다시 친정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아버님은 또 다시 내가 갖고간 선물들을 손에 드시고 산으로 가자고 하셨다. 마침 백화가 만발한 봄날씨라 즐거운 마음으로 들꽃이라도 실컷 볼 요량으로 따라 나섰다. 산소 주변에는 사철나무 사이사이에 분홍빛 진달래며 노란 개나리꽃, 하얀 철쭉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조부모님 묘 아래쪽에 커다란 묘가 나란히 좌우로 두 개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닌가.

전엔 못 보던 묘라서 의아하게 여기며 여쭈니 “오른쪽은 장차 내가 갈 집이고 왼쪽은 장차 네 어머니가 갈 집이다.”하시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시는 것이었다. 잠시 주변의 잡초를 손수 뽑으시고는 집으로 내려오면서 아버지는 천천히 말씀하셨다.

“내년 봄엔 너의 오라비들 갈 집을 마련할까 한다. 할아버지 묘는 내 머리 부분이고 나와 네 어머니 자리는 그분들의 가슴쯤 되고 네 큰오라비 자리는 그분들의 오른팔을 펴신 자리에 너의 작은오라비 자리는 그분들의 왼팔을 펴신 위치에, 그리고 네 막내오라비 자리는 그분들이 발을 뻗으신 위치쯤에 이미 터는 정했으니, 둘레에 잔디를 깔고 사철나무와 꽃나무들을 사다 심어야 하고 저 길에서 산소에 올라오는 길을 좀더 넓혀서 너희들이 나들이 삼아 서울서 내려올 때 자가용이 산소 가까이까지 갈 수 있게 해야겠다. 그 공사(工事)가 크단다.”

아버님은 마치 시집가는 색시가 시집갈 때 갖고갈 물건들을 준비하듯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셨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시고 큰오빠도 내가 미국에 온 얼마 후에 뒤를 따르셨다. 몇 년 전 내가 귀국해서 친정에 들렀을 때 들리는 말에 큰 조카며느리가 선산을 팔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내 큰조카며느리는 내 아버님의 맏손자며느리로서 시할아버지의 유산과 유언을 누구보다 성실히 받들어야 할 사람이거늘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하여 알아보니 선산 가까이까지 이미 개발의 손길이 뻗어와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아파트 건축업자에게 선산을 팔면 일확천금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기가 막혀 조카며느니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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