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교리강좌] 선교겸수(禪敎兼修)의 고려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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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교리강좌] 선교겸수(禪敎兼修)의 고려불교
  • 해주스님
  • 승인 2007.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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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교리강좌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이르는 백여년 동안 형성된 구산선문이 자리잡은 곳은 대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으며, 그곳에서 선승들이 지방호족과 결합하여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고려조를 세운 왕건도 그러한 지방호족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려 태조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선(禪)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북악파 화엄학의 거장 희랑(希郞)대사가 해인사에 거주하면서 화엄신장을 부려 왕건을 도와 승전하게 하였다는 설화도 있으며(남악파 관혜대사는 견훤을 도움), 도선(道詵,809-898)의 비보사탑설(稗補寺塔說)의 영향 또한 대단하였다. 비보사탑설이란 동국의 흉처를 사탑으로 비보하여 사원의 군사적 경제적 실용성을 높이고자 한 것으로 선의 실용성을 음양오행사상과 교묘하게 결합시킨 것이다.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이같은 태조의 불교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불교는 태조가 마련해 놓은 이 기틀 위에서 선(禪). 교(敎)에 도참(圖讖)의 요소가 가미되어 전개해간다.

여기서 맨 먼저 주목되는 것은 광종대 균여(均如, 923-973)의 성상융회적 화엄학이다. 균여는 태백산 부석사를 본찰로 하는 의상(625-702)의 뒤를 이어 북악의 성기사상을 중심으로 남북악을 통일하였다. 그리하여 보현행의 실천운동을 민중속에 정착시키고자 하였으니, 40화엄의 보현행원을 내용으로 한 11수의 향가가 전해지고 있다. 법계도기를 비롯하여, 화엄저서에 대한 원통기들도 그의 화엄관을 담아 전하고 있다. 또 균여의 선배인 탄문(坦文,900-974)과 그 뒤를 이은 결응(決凝,964-1053), 그리고 그 후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화엄교학과 불사가 융성하였다.

한편 선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었으니 선정쌍수의 통합적인 선사상인 법안종이 전래한 것이다. 또 화엄대덕인 경덕왕사 난원(爛圓)에게 출가한 후 난원의 화엄을 이어 강학하고, 화엄전적을 모은 원종문류(圓宗文類)를 남기기도 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은 균여계의 화엄학을 배척하고 천태종의 개립을 통해 선․교 대립을 지양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선과 교를 회통한 선교겸수의 주창자로서는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을 제일로 손꼽지 않을 수 없다. 12-3세기에 접어들면서 내우외환이 겹친 고려불교는 그 우환을 떨치려는 불사가 무수히 봉행되고, 그 와중에 승려들의 타락상이 난무하게 되었다. 지눌은 이를 통탄하고 승려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자는 힘찬 사상운동을 일으켰으니, 산림에 은둔하여 정혜(定慧)에 힘 쓸 것을 역설한 정혜결사운동이다. 지눌의 정혜쌍수는 바로 돈오점수(頓悟漸修)설에 입각한 것이다. 인간의 본심〔空寂靈知〕은 본래 제불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깨달아(돈오), 이타행을 점차 전개해 가야 할 것(점수)을 주창함이다.(비록 돈오한다 해도 번뇌는 곧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事非頓除의 점수설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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